깊은 안개에 잠겨 이경숙 부서질 듯 청정한 햇살 노란 국화 사이 정갈한 슬픔을 먼 그곳 유착된 연인의 입술 사이 우주를 숨겨 경적을 울릴, 수의 입힌 홍엽이 산자락 잡아, 슬픔, 기쁨인지 마음은 성체다 노을이 비길수록 회상에 빠져 상처는 상처 밖의 날개에 비가悲歌를 부르고 요람이 되고 관이 되고 무덤이 되는 세월의 빛은 없어도 회상 속에 빠진 가을 잘못 기억으로 또렷하다면 너를 섬길 객쩍은 인사인데 가을 물감엔 파계다 마음의 한때가 지독한 분개와 예민으로 알코을 같던 저녁 냄새 쓸쓸한 사무침과 빈곤한 사랑의 굴종 달그림자 가슴 도려내어 없는 의식, 비명처런 곡진한, 붉던 밤의 사연 내 영혼을 내려다볼 때 앓던 심령 같아 불덩이로 깨어난다 약력: 2013년 장애인 창작집 발간사업 선정. 시집 ‘그리움이 피는 꽃’ 외 용인문학회 회원
뭉게구름 나경호 나는 미세한 먼지로 태어났어요 자유가 그리워 끝도 없는 허공을 떠돌아요 그곳에도 친구들이 있어요 우린 함께 뭉쳐 살아가요 어우러진 모습을 사람들이 보아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림이라 해요 누군가 신들려 만든 작품이라고도 해요 언제 사라질지 모를 우리는 해 아래서 더욱 빛이 나요 날씨가 활짝 갠 날이면 하늘 위에 꽃을 수놓아요 꽃을 그리다 엉클어져 솜털을 만들기도 하지요 우리의 작품은 완성품이 아니에요 손에 잡히면 부서질 듯 언제 사라질지 모를 미완성품이에요 그래서 값을 매길 수 없어요 눈으로만 보고 감동으로 값을 치르는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매우 희귀한 작품이지요 <약력> 용인문학회 회원 환경기술사, 공학박사
여강驪江 개불알꽃 이경철 봄이 오고 있네요 짓밟아 주세요 풀리는 저 강물 따라 달리고픈 이 마음 자꾸자꾸 밟아 주세요 언 땅 비집는 손바닥만 한 햇살 까치발로 쫑, 쫑, 쫑 피어나는 개불알꽃 먼, 먼 날 만난 소녀의 민낯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풀꽃, 풀꽃들 우리, 속 터지는 연정戀情일랑 저 여강에게나 주고 가도 가지 않을 사랑 하나 꾹꾹 눌러 밟는다 개불알꽃아. 약력: 2010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 『그리움 베리에이션』 등.
구절초 봉후종 산 그림자에 비친 그대 하얀 미소 머금고 피어 구구절절 맺힌 사연을 풀어 놓는다 그대의 가슴은 하얀 하늘 마디마디 얽힌 인연에 붉혀지는 삶의 뒤안길 바람따라 출렁거린다 머문 그 자리 마다 찬서리 맞으며 물들이고 다섯마디 삶의 조각들 아홉마디로 피고 진다 꽃대를 흔들 때마다 허공으로 번지는 눈물 내 사랑 꽃이 되어 연기처럼 하늘로 날으며 하얗게 벙그는 어머니 약력: 용인문학회 부회장 학교법인 강남학원 법인이사 한도스톤(주) 30년 경영
편지 김혜자 책상을 가졌습니다 식탁이 늘 내 책상이었는데 올 가을엔 작은 방 창가에 따로 책상을 두었다니까요 칠순엔 꼭 내 책상을 하나 갖겠다고 별렀는데 칠순 지난지도 여러해 이제서야 나도 나를 만나고 싶을 때 그리움이 차오를 땐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 있어 볼게요 창밖엔 감나무와 모감주나무와 목련나무가 있어 바람부는 날은 제 창문을 두드리기도 하죠 까치와 까마귀가 주인 같지만 이름 모를 철새들도 제법 놀다 가곤 한답니다 시끄러운건 질색인데 이때만은 제 귀도 순해집니다 모감주나무꽃이 필 때는 붕붕거리는 벌들의 날갯짓소리도 들려요 지금은 갈색 꽈리봉지에 싸인 열매가 까맣게 단단해 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어느 불자의 손에 어여삐 감싸쥔 염주로 태어나 닳아질 때까지 기도에 동참하겠지요 주홍빛 커다란 감이 서른개도 넘게 달렸었지요 가을 내 새들은 제 몸 내어준 감을 쪼아 먹으며 사리 몇개씩은 품었을거예요 봄, 잎새가 나기도 전에 저홀로 피는 흰목련이나 수줍게 비밀을 내보이는 감꽃도 그려 보셔요 꽃과 향기가 제 창에 스며들고 푸른 잎새들이 허공에 악보를 그리고 연주하는 모습도요 쏴아아 파도소리 내며 잎새들이 우는 날은 피치 못할 어떤 이별이 있음을 기억할게요
어둠에 익숙하다는 고백을 듣는 나의 자세 고영서 바람의 틈새를 뚫고 이미 뚱뚱해진 허무가 소리를 일그러뜨리며 다가오더니 생각 없이 늘어선 넝쿨에게 거친 키스를 마구 퍼부었어 새의 날개를 색칠하면 그것은 감추고 포장하고 거짓말하는 신기한 비밀이 된다고도 했어 아무 느낌이 없어서 그저 슬픈 경험으로만 쌓이고 마는 사랑을 끝내고 나면 무르익은 버릇처럼 보이는 건 모두 구멍이 되었으므로 달맞이꽃을 닮았다는 그녀의 고백을 웃으며 들을 수 있었어 제 한 몸 누울 온기를 찾지 못해 고통스럽게 숨을 끊어내고 있던 고양이는 동그란 창틀 곁에서 벼르던 말 한마디 끝내 게워내지 못하고 땅으로만 맴을 돌다 영정 없이 떠나고 말아 죽어가는 거미의 떨리는 다리처럼 미세하게 남은 체온이 마지막으로 전해질 수 있다면 붉게 찢긴 목소리라도 남기고 오겠다며 바다 모서리를 붙잡고 그녀는 기어이 섬으로 떠났고 나는 빈 벽에 매달려 죄인처럼 밤을 지새우는 덩굴풀만 바라보고 있었어 앓고 있던 비문증이 그녀로 가득 찼어 * 약력 : 용인문학회 정회원. 용인문학 아카데미 시낭송반 책임강사
거미 조태명 검은 숲이 바람으로 샤워를 하면 거미는 거문고 줄을 조인다 현에 달린 이슬방울 튕겨내고 어제의 흔적을 지우며 오늘의 악보를 펼친다 촉촉한 바람을 구워낸 진액 심장에 발라 죽음보다 아픈 향기를 만든다 하늘로 통하는 길목에 허브 카페 열어 찾는 이와 죽고 사는 밀당을 한다 향에 취한 이가 그물에서 옷을 벗는다 거미는 슬픈 몸짓으로 줄을 타고 목덜미에 달콤한 작별의 키스를 하면 심장이 녹아내리는 짧은 사랑은 진다 한올 한올 지은 집에 빨간 새끼들 소란스럽다 식욕을 자극하는 줄의 파장 치명적 침샘 깨워 어미 몸을 녹여 서서히 삼킨다 몸집 키운 새끼들 바람줄 타고 숲으로 사라진다 하늘이 갈대로 숲길을 쓸고 가면 검은 산이 들판에 자리 펴고 앉는데 거미의 촉촉한 연주는 거문고자리 별 속에 이슬방울로 스민다 약력 2018년 『시와 소금』으로 등단 용인문학회 회원 (사) 한국사진작가협회 정회원 행정학 박사
사막의 위로자 김병숙 모래바람을 등짐으로 지고 황량한 언덕 굴곡진 길을 걷는 끝을 알 수 없는 미로 선명하게 남은 발자국들은 안으로만 삼킨 울음 주저앉을 수도 없고 뒤돌아 갈 수도 없는 생애 그나마 사막의 길을 내었다 걷고 또 걷는 멈출 수 없는 여정 묵언 수행만 호흡이 되는 곳 목마름이 가시가 되어 육신을 찔러도 떠날 수 없는 세월이 숨어 사는 사막엔 밤마다 손바닥 가득 묻어나는 별들만이 진정한 위로자 약력: 용인문학회 회원
휠체어의 반경(2024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조은정 아픔의 무게만큼 하루를 밀어낸다 불 꺼진 병실에 접어놓은 우두커니 온종일 바쁜 바퀴는 이제야 잠이 든다 꿈속을 굴려봐도 상처뿐인 막다른 길 굴리는 대로 굴러간 당신 손을 감싸면 가파른 시간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주저앉은 불빛마저 걷기 연습 한창인데 환한 봄 언제 올까 길목이 피어난다 당신과 멀어질수록 일어서는 내일들 2024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용인문학회 회원 시란 동인
개두릅 나무에게 최동순 우지마라 겨울이 차가운 사슬로 발가벗은 너를 동여매더라도 이제 더 이상 아파하지 마라 주위에 나무들이 푸른빛으로 흔들리던 여름 너의 몸에는 지난 초봄 잎을 뜯기운 자리마다 아픔이 돋아서 단 하나의 잎도 없이 가시가 되어 버렸지만 우지마라 이제 곳 눈은 내려 상처마다 난 네 슬픔 덮이고 내년 봄 다시 새잎을 피울 것이니 지금은 우지마라 * 용인문학회 회원
잠 문태준 혼돈과 공허로부터 태고의 옷 입은 모습으로 어김없이 다가온다 나에게서 나를 끝모를 깊은 궁창의 세계로 기묘한 평온의 세계로 순례하게 하는 너 휴~우 외마디 긴 날숨소리 한줄기 빛이 들어와 눈은 떠지고 새 생명의 날은 시작되네 영원한 잠의 나라를 향하여, 참 빛 안에서, 약력: 전남 장흥 출생 현) 용인문학 아카데미 시창작반
봄바람 난 담장 옆으로 이금한 봄바람 난 담장 옆으로 화분 하나 내어 놓습니다 동창으로는 햇살이 빗살치어 꽃이 기웃합니다 눈길이 비스듬하니 마음 또한 어슷하니까요 마음짓은 꽃대에서 뿌리로 이어붙이고 몸짓은 잎이 잎들에게 슬쩍슬쩍 어우러져야지 모습이 영글고 이야기꽃이 피어납니다 봄바람이 나고 꽃이 피는 담장은 기적의 연출입니다 꽃은 남겨진 향기로 영원히 기억하겠지만 꽃 진 자리로 이어가자는 언약은 이내 잊겠지요 내어놓은 화분에서는 뜨거운 마음이 피어납니다 갇혀있던 공간으로부터 무의미한 바람이 지나갑니다 담장은 봄바람이 나기 직전 안식입니다 화분 하나 내어놓고 갈증을 잊습니다 꽃 진 자리에 소망이 피어날까 담장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서 봅니다 이금한 강원특별자치도 출생. 2004년 월간 『시사문학』으로 등단. 시집 『바람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2015), 『관덕정 일기_돌아가기 위해 떠나는 여행』(2019), 『너를 닦으면 선명해지는 오늘의 날씨』(2023)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