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 오래전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이라는 저술에서 생물 진화의 원리를 변이➜선택➜전승이라는 차원으로 설명했다. 생물은 여러 방향으로 변이를 하지만 환경에 맞는 변이가 선택되고 후대로 전승되는 과정을 거쳐 진화한다는 원리이다. 이정동의 『기술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에서는 기술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고 말한다. 찰스 다윈의 생명진화가 세 단계로 설명이 된다면 기술진화는 여섯 단계로 제시된다. 여러 가지 기술이 밑바탕이 되어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는 조합진화가 첫 번째 단계라면 이들 기술이 애초에 생각했던 목적과 다르게 쓰이기도 하는 굴절 적응이 두 번째 단계이다. 이렇게 발전하는 기술들은 도약적으로 급발진하지 않고 한 걸음씩 발전하는 것이 셋째이다.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축적되고 수요가 폭발하는 것이 넷째와 다섯째라면 여러 가지 기술이 서로 영향을 미치며 함께 진화하는 것이 여섯째이다. 생물의 진화는 선택적이지만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의도가 깊이 관여하며 이렇게 생겨난 기술은 다시 인간사회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 인간의 의도가 깊이 관계하는 기술의 진화는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심지어 이렇게 진화한 기술은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
용인신문 | 의료기술 발달 덕에 초고령화 시대를 맞이하고 있지만 여전히 정복하지 못한 질병이 있다. 질병의 증상들이 보여주는 극한의 상태는 인간이 삶의 존엄을 지키기에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 놓인 남유하 작가의 어머니 故조순복 여사의 여정을 그린 에세이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가 출간되었다. 故조순복 여사는 온몸에 암이 전이되어 통증을 호소하며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 스위스행을 결정한다. 곁에서 간병하던 남편도, 이를 지켜보는 딸도 주변의 비난이나 법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마지막 선택에 의견을 보탤 수 없었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자 조순복 여사는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고 말한다. 하루라도 더 빨리 지옥보다 고단한 통증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출판사는 故조순복 여사가 '스위스 조력사망기관 디그니타스에서 생을 마감한 여덟 번째 한국인' 이라고 소개한다. 책 속에서는 우리나라에서는 조력 사망에 관한 법률이 없기 때문에 말기암처럼 여행에 힘든 컨디션임에도 불구하고 열 시간 이상의 비행을 감내하고 스위스까지 가려고 하는 이들이 백명이 넘고 있다고 소개하기도 한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찾아오는 극한의 상황을 감내하는 것과 거부하
용인신문 | 독일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사회주의 체제의 동독과 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한 서독으로 분리된다. 동독과 서독 사이에는 장벽이 세워졌고, 이 벽을 넘는 이들은 목숨을 잃기도 한다. 1990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면서 통일이 되었다.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카이로스』는 독일 여성작가 예니 에르펜베크의 작품이며 2024년 부커상 인터내셔날 수상작이기도 하다. 『카이로스』는 1986년에서 1992년에 이르는 카타리나와 한스의 격정적인 사랑 이야기인 듯 보이지만 결국 처참하게 무너지는 사랑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열 아홉의 카타리나는 동베를린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교육받고 자랐으며 가끔 할머니가 있는 서베를린으로 여행을 다녀온다. 한스는 과거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반파시즘을 내세우는 사회주의 진영을 택했지만 40년이 지난 시점에서 자신의 선택에 회의를 느끼고 있다. 그간 사회주의 체제와 권력자들이 보여준 일련의 상황들이 진정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일이 아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엇나간 둘의 사랑은 영원할 듯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파국에 이른다. 한스가 카타리나에게 사회주의 국가의 국가(國歌)에 부활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이 이
할머니의 갈치구이 백현주 아침에는 회사 앞 라면가게 점심엔 낙원동 값싼 점심을 저녁에 또 회사 앞 어느 호프집에서 끼니를 해결하던 서울생활 자취생의 끼니사정은 늘 노숙자 신세다. 모처럼 휴일에 나선 고향 길은 버스도 날고, 나도 난다. 아직 대관령도 가지 못한 버스는 벌써부터 시장기를 불러온다. 군불 땐 아랫목도 보일러에 밀려 없어지고 나를 반기던 바둑이도 아파트가 생기면서 없어졌지만 여전히 할머니네 풀 먹인 사락사락 그 시원하고 포근한 이불은 명치 속 얼음덩이도 녹여준다. 해가 꼭대기로 차서야 일어난 손녀 앞에 내민 밥상 위엔 굵직한 갈치가 노릇하다. “이거 먹었다고 애비한테 하지 말어” 약력: 단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
용인신문 | 그림책은 대개 유아들을 위해 만들지만 요즘엔 전 연령이 함께 보고 즐기며 생각을 나누는 매체로 활용이 많이 되고 있다. 그중 다비드 칼리의 그림책 『적』을 함께 읽어보길 권한다. 『적』은 두 병사의 어이없는 싸움에 관한 이야기이자 화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두 개의 참호 안에 숨어 있는 병사는 서로를 적으로 삼아 전쟁 중이다. 서로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아침마다 서로에게 총을 한 방 쏘고는 참호로 숨어든다. 전쟁은 벌어졌고 동료는 죽었으며 배고픔은 더욱 힘들게 했다. 이제 고독한 참호에는 찾는 이도 없어졌다. 두 병사의 지리한 전투를 이어가게 만드는 건 다름아닌 전투 지침서이다. 그 지침서에 따르면 적은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잔인하게 죽였기 때문에 전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지침서를 병사에게 전달한 ‘명령하는 사람들’에겐 지침서의 내용이 사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사실과 다르게 써 있었지만 병사들은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을 뿐이다. 다행히도 그림책 『적』은 어린이를 위한 작품 답게 두 병사의 어리석은 싸움을 아주 지혜롭게 끝낸다. 평화는 어디에서 오는걸까? 하늘의 별을 본다면 가능할까? 참호 안에서 홀로 차가운 비를 맞아본다면 평화가
용인신문 | 삶의 진실은 오랫동안 중요한 가치로 신봉받아왔지만 그 의미의 다양성 때문에 우리에게 이야기가 필요했다. 이야기들은 다양한 삶의 모습을 담은 채 무궁무진한 보물상자처럼 끝도 없이 창작되어 전승되고 있으며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이야기의 탄생』은 이야기를 뇌과학의 관점과 연결해서 설명한다.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우리의 뇌가 만들어낸 세계에 대해서 알아본 후 그 세계에 있는 결함있는 주인공을 만나 본다. 주인공의 잠재의식 속에서 인간의 삶을 다채롭게 하는 이야기의 모습들을 탐구한 후 그 의미와 목적을 탐색해 나간다. 필자는 우리가 심리적으로 건강할 때 우리의 뇌가 스스로를 도덕적 영웅이라 느끼게 만들어 준다고 한다. 그래서 영웅이라는 근거로 어떤 ‘사실’을 발견하면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덜컥 믿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이야기 속 주인공은 보물을 찾기 위한 여정에 오른다. 그렇다면 이야기 속에 내재된 의미는 진실일까? 어떤 존재의 욕망이 투사된 대중을 향한 교묘한 명령일까? 만들어진 이야기의 목적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그 이야기들 속에는 인간 내부의 폭력과 잔혹성의 원인을 탐구하기도 한다. 이야기와 사실이 혼재된 연말을 보내
용인신문 |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들 못지않게 복잡하지만 목표 하나는 분명하다. 함께 살아가길 원한다는 것, 머리의 소리보다는 몸의 언어에 더 익숙해 갈등이 생기곤 하지만 단순한 규칙을 정해 함께 어울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동화 『룰스』는 이미 함께 지내는 훈련을 잘 하고 있는 아동보다는 어른들에게 필요한 동화일지 모르겠다. 『룰스』는 주로 관계의 규칙을 상징하는 제목이다. 이 동화에서 집중하는 관계는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남동생 데이비드와 누나 캐서린이 중심이지만 캐서린네 옆으로 이사온 크리스티와 캐서린, 데이비드의 작업치료실에서 만난 제임스와 캐서린의 관계 그리고 캐서린과 부모님과의 관계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주변과 소통하지 못하는 데이비드는 캐서린에게도 버거운 존재이다. 그런 데이비드에서 어린 캐서린이 가르쳐 주는 인간관계의 규칙들은 캐서린 자신과 현실을 사는 어른들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기도 하다. “사람들은 네가 좋아서 웃기도 하지만, 너를 놀리려고 웃을 때도 있다”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를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와 같이 비관적인 면모가 있기도 하지만 “규칙은 꼭 지킨다”, “간직할 가치가 있다고 다 쓸모 있는 건 아니다”와
용인신문 | 잘 풀리지 않는 일 때문에 식욕이 끊이지 않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어째서 열심히 일하는데도 삶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어째서 나라를 사랑하는 이들이 이렇게 많은데도 세계는 여전히 부조리할까? 이러한 질문이 있다면 『잔인한 낙관』을 읽어보길 권한다. 어떤 대상에 애착을 갖는 것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낙관적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삶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던 애착이 오히려 삶을 마모시키는 경우가 있다. 필자는 이를 ‘잔인한 낙관’이라 표기하며 대체로 여기에 빠진 이들은 헤어나기오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애착을 갖는 이의 감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애착을 갖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부름, 혹은 보이지 않는 명령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를 위해 투표를 하는 것도 사례 중 하나로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 덧붙이면 이 책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좋다고 여기는 것들이 정말로 좋은 것인지 되묻는 내용이기도 하다. 열심히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은 좋지만 그로 인해 인권이 훼손되거나 건강 혹은 관계가 훼손되는데도 ‘꿈’이라는 것을 위해 다른 것을 잃을만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정보와 전문가들이 넘쳐나는 시대
용인신문 | 치유라는 의미의 단어 힐링(healing). 우리 주변에 힐링이라는 말이 흔하게 들려온다. 하지만 이 말의 이면을 생각해 보면 그만큼 우리 사회, 우리의 몸과 마음이 병들어 가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단어이기도 하다. 다소 급진적인 제목을 가진 『휴식은 저항이다』라는 도서는 쉬어야 우리의 상상력이 발현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흑인 노동역사를 공부하며 백인우월주의와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더 나아가 부지런히 일하라는 권면 속에는 쉼이 곧 ‘수치’라는 것을 내재화하는 방식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장애차별적, 가부장적 체제가 주입한 생산성을 내면화 한다. ‘생산성’ 있는 상태를 유지하려는 욕구와 집착이 우리를 피로와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이끈다”는 저자의 지적이 낯설지 않다. 저자의 적극적 대안은 잠을 자라는 것. 쉼의 구체적인 행위에 가장 기본이 되는 잠을 권면하며 ‘낮잠사역단’을 조직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새벽형 인간, 저녁형 인간을 부르짖으며 끊임없는 자기계발을 권하는 사회. 더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한 행동강령을 주제로 한 서점가의 판매순위권 도서들. 부지런히 일하는
용인신문 | 미학자의 일이 아름다움을 말해주는 일이라면 그 일을 탁월하면서도 맛깔나게 하는 이가 있으니 바로 유홍준이다. 유홍준이 펴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국내 12편, 일본 5편, 중국 3편에 이르며 무려 500만 부 이상의 판매 기록을 세우고 있다. 그 외에도 박물관 순례기를 두 권에 걸쳐 출간했다. 유홍준이 새로이 출간한 책은 그의 인생 답사 결과물이다. 유홍준은 자신의 글을 ‘잡문’으로 표현한다. 이는 옛 선인들의 문집을 읽을 때 정통적인 글쓰기라 말하는 저술보다 잡저(雜著)에 인생이 녹아있는데 그 정신을 이어받겠다는 의미에서 쓴 말이다. 도서는 유홍준이 28년 동안 써 온 글을 선별하여 인생만사, 문화의 창, 답사 여적, 예술가와 함께, 스승과 벗 등 다섯 개의 장으로 나눠 수록했다. 후반부에는 글쓰기에 대한 조언을 담고 있다. 수록된 글은 한결같이 전통과 문화 혹은 사람, 인문적 정신에 대한 진정성이 묻어난다. 담배 이름 하나에서도 추억을 소환하며 좋아하는 바둑으로 한미 FTA를 해석한 부분도 인상적이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발굴해 낸 인사동 고서점 주인 이겸로 선생과의 일화도 눈물겹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장례식에 문화재청장
용인신문 | 한국 작가의 노벨상 수상이 발표되고 한 달, 작가와 작품에 대한 열기는 좀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제 누구나 알 법한 문학가의 탄생이라는 관점에서 우리나라의 예술에 대한 평균 안목이 높아졌음을 실감한다. 그렇다면 노벨상 수상 작품의 무게는 어떨까? 노벨상의 목적이 인류 평화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상이라면 작품의 무게 또한 범상치 않다는 것을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발견한다. 작품을 이끌어가는 큰 서사는 우리 현대사 속에서 이념갈등으로 인해 죽은 민간인들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1948년 제주도에서는 빨치산 조직의 진압이라는 명목으로 주민들이 희생당했으며, 한국전쟁 중에는 국민보도연맹원이나 양심수 등을 포함해 10만 명 이상이 학살을 당했다. 소설에서 이들의 죽음은 인선 엄마의 가족사로 대표된다. 이웃 마을로 심부름을 갔다가 화를 면한 엄마는 운동장에 쌓인 시신 속에서 몰살당한 가족을 발견했으며 이후 평생을 시신 위에 쌓인 눈을 잊지 못하고 있다. <작가의 말>에서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 한 것은 소설 속 인물들이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다시 과거로 그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다친 인선을 대신해 제주
용인신문 | 파브르는 곤충기로 유명세를 얻었지만 식물기도 적은 학자이다. 파브르에게 매력을 느낀 이상권 작가는 소설가이지만 과학과 미술을 사랑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소년의 식물기』는 작가의 어릴 적 꿈이 눈꽃처럼 꽁꽁 포장되어 있는 도서이다. 이 책은 식물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옛이야기책처럼, 에세이처럼, 소설처럼, 사회평론처럼 읽을 수 있기도 해서 표지 디자인만큼이나 다채롭다는 느낌이 든다. 열 여섯 꼭지에 등장하는 식물의 수가 방대하다. 마늘과 나리와 양파의 상속 방식이 다르다. 우리가 아는 나무의 눈이 꽃눈과 잎눈이 어떻게 다른지도 알게 된다. 뱀딸기와 클로버의 번식을 자식의 독립에 연결해 설명하는 부분도 흥미롭다. 식물과 연결해 등장하는 또다른 생물들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저자는 이야기 작가이지만 『소년의 식물기』 속에는 식물의 진화와 형태, 해부학적인 모습, 곤충과의 관계, 화분, 식물들의 역사 등이 다채롭게 서술하고 있다. 작가인 아버지와 딸이 직접 작업한 그림들도 인상적이다. 단순히 식물의 식생을 포섭해 지면에 옮기는 것과 달리 이야기가 있는 식물기라 할 만하다. 나무의 뿌리를 공화국에 비유해 설명한 부분은 인상적이다. 경제논리에 의해 도시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