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말은 ‘예기禮記’에서 처음 나온 말이다. 수‘首’는 ‘머리 수’자인데 여기서는 동사로 쓰여 ‘머리를 둔다. 머리를 향한다’는 뜻이다. 곧 ‘언덕으로 머리를 두는 첫 마음’이란 뜻이다. 옛날 전설에 ‘여우는 죽을 때 옛날 태어나 놀던 산언덕으로 머리를 향하고 죽는다’고 하여 고향을 그리는 심정을 나타냈다. 그래서 ‘고향 언덕으로 머리를 두는 처음의 마음’이란 뜻이다. 곧 애향지심愛鄕之心으로 고향을 그리는 간절한 마음이 깃들어져 있다. 하찮은 여우도 죽을 땐 고향을 그리는 처음의 한결 같은 애향심을 가지고 죽거늘, 하물며 사람에게서랴? 사람도 누구나 고향이 있고, 그 고향을 그리워하며 그 고향에 가고 싶고, 그 고향에 가 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니 고향을 두고서도 가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심정이야 오죽하겠는가? 이산가족의 대부분은 고향을 못가는 사람들로 그 고향 생각이 간절함은 애향의 노래로 달래볼 것이다. 나도 애향심·수구초심에 젖어 그동안 모아왔던 족보들을 고향에 기증하기로 했다. 그러나 ‘누울 자리보고, 다리 뻗어라’고 때가 익어가야 되는 법인데, 독촉에 못 이겨 장소도 없이 책을 덜렁 내 놓은 것이 잘못이었다.
[용인신문] ‘용인’ 하면 떠오르는 것은 에버랜드와 민속촌,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된 이 오래된 관광지는 세월이 변하여도 그대로인 것 같다. 그동안 용인은 시간의 흐름 속에 상전벽해를 이루었다. 옛 도로는 확장되거나 다시 길을 내서 몇몇 시골길을 제외하곤 옛 정취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빠른 것이 효용처럼 느껴지는 세상에서 어딘지 낭만과 여유를 잃어만 가는 것 같아서 씁쓸함이 밀려온다. 직선으로 뻥 뚫린 길이 주는 시원함에 묻혀서 더디고 둥글게 에둘러가는 것에서 느낄 수 있는 운치 또한 정작 잃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유유자적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정서의 환기를 주는 것이고, 그런 여유 있는 삶이 생활의 만족도를 부여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모두를 차치하고, 나는 600주년을 넘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용인에 제대로 된 문학관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매우 유감이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타 지역에 방문하면 그곳에 있는 문학관을 탐방한다. 그곳에서 그 지역이 자랑하는 작가의 삶, 이모저모를 느끼고 접하면서 문학인으로써 자부심을 갖게 된다. 하지만 우리 지역엔 그러한 문학과 문학인을 기리는 문학관이 어디에도
[용인신문] 자연에게 물들여지고 꿈을 키워가는 곳, 용인! 2006년에 용인 죽전으로 이사를 와서 10년을 넘게 살았으니 제2의 고향이다. 어디나 처음은 낯설고 눈길 주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식물과 들꽃을 좋아하는 내게 집에서 가까운 곳에 대지산공원이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자연에 물들여질 수 있는 대지산공원은 사계절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게 해 줄 뿐 아니라 작은 야생화 단지가 있어서 내겐 더 없이 좋은 쉼터였다. 그 곳엔 이른 봄부터 가을까지 계절에 맞게 피어나는 야생화를 심어 가꾸었다. 지금은 많이 훼손되어 빈집이 많아져서 아쉽다. 은방울꽃과 초롱꽃이 가끔 보고 싶다. 사계절 중에서 봄을 얘기하고 싶다. 그 이유는 기다림의 정점이라고 할까? 마른가지가 바람을 불러오고 딱따구리가 집을 짓고 나면 어김없이 봄이 눈을 뜨고 밑그림을 그린다. 가장 먼저 생강나무의 겨울눈이 부드러운 겉옷을 벗기며 나온다. 얼음새꽃이 서릿발 속에서 금잔을 피워내고, 바람꽃이 꽃대를 올리면 올 괴불나무 꽃들은 향낭을 흔든다. 낮은 곳에서는 까마귀밥나무 꽃이 작고 노란 몸짓으로 향기를 밀어 올린다. 밑그림이 끝나면 생강나무가 꿀 향기 풍기며 노랗게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용인신문] 용인은 우리 아이들의 태어나 자란 곳으로 나의 고향이 된지 20년의 세월이 훌쩍 넘었다. 나의 청춘은 언제나 용인의 청소년들과 함께였다. 그동안 상담과 강의로 만난 용인 청소년들이 성장하여 건강한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어 다니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다. 1996년 명지대 상담실을 오픈하여 근무하다가 1997년 용인시청소년상담센터를 오픈하고 2013년 용인시청소년지원센터 꿈드림을 오픈하였다. 동생을 잃고 살짝 우울하게 지냈던 청소년 시절이 동기가 되어 시작된 상담공부는 청소년을 선택하게 되었고 그들을 도울 수 있다는 행복한 마음에 노처녀가 되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일했다. 청소년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서 상담으로 마음을 헤아리고 강의로 바람직한 방법으로 사는 것에 대해 동기부여 하고 어려운 처지를 분별해서 나라의 재정으로 지원할 수 있어 뿌듯했다. 한 지역사회에서 청소년과 관련하여 첫발을 내딛고 오랜 세월 공들이며 산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로 마음이 어려운 친구들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20만이 넘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도시를 설계할 수 있도록 더 적극적으로 제언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이 남는다. 인근 청소년 인구가
[용인신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얘기가 올 겨울은 예년에 비해 춥지도 않고 눈도 거의 오지 않았다며 아쉬워한다. 정말 이러다가 아예 겨울이 없어지는 것은 아닌지, 눈 구경도 못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된다. 어쩌다 지구가 이렇게 됐는지. 그럼에도 우리는 환경보호를 말로만 떠들 뿐 쓰레기분리수거 같은 작은 실천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으니 한심할 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덩이 지구가 썩어가고 있다. 동식물이 살기 위해 숨을 쉬어야 할 공기는 미세먼지와 매연으로 안경을 쓰고, 입과 코를 가릴 마스크를 하여야 나다닐 수 있어 마치 복면강도들과 같은 몰골이다. 물은 각종 가축과 공장폐수로 오염돼 개울에는 혼탁한 물이 흐르고 상수도 물도 믿지 못하여 정수기로 또 걸러 먹으며, 깊은 옹달샘물을 받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 떠 와야 한다. 사람들이 이동편의를 위해 산을 뚫고 들을 메워 사통팔달로 길을 내고, 각종 공장과 생활편의 시설을 건설하기 위해 산을 깎아내리고 논을 메우니 땅이 만신창이 상처투성이가 되어가고 있다. 자연은 태초에 생길 때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할 때 자연인 것인데, 자연환경파괴는 100% 인간들에 의해 파괴 훼손되고 있으
[용인신문] 유홍준씨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보면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라고 했다. 나는 널리 알려진 유산보다 우리의 향토문화 유산을 더 귀중히 여겨야 한다고 덧붙이고 싶다. 향토문화가 잊혀지고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탈 향토문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농업 국가였기 때문에 한곳에서 수대를 살아온 정주생활이었다. 정주생활을 통해 그 고장의 지명과 골자기 그리고 사람이 살아오면서 있었던 모든 것이 녹음이 되어오듯 전래되어 왔다. 고장의 지명이나 이야기는 배운 것이 아니라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활이 그렇게 만들었다. 어려서부터 꼴 베고 나무를 하더라도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동네 사람이 함께 했다. 또 어른 아이 같이 했다. 오며 가며 쉬며 끊임없이 나눈 이야기가 골짜기 시내 나무 바위에 얼킨 이야기였다. 바위이름 하나하나는 그냥 바위가 아니라 이야기가 있다. 광교산 9부 능선에 고염 나무 골이 있다. 고염은 사람이 먹는 과일이다. 이 나무는 감나무 접목의 대나무이기도 하다. 이 높은 곳에 고염나무가 자생하는 것은 사람이 이곳에 살았다는 증좌다. 바로 밑에 농골과 논골이 있는데 농골에는 농바위라는 큰바위가 있
[용인신문] 남편 직장 때문에 용인에 온지 이십년이 넘었다. 제주도가 고향이라 ‘제주댁’에서 요즘엔 시댁 식구들에게 ‘용인댁’으로 통한다. 공기 좋고, 자연을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용인에서의 삶은 큰 축복이다. 이런 평범한 용인댁이 어느 순간부터 장애인들과 음악 활동을 한지 십년이 넘었다.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음악 전공했냐?” 와 “장애 가족이냐?”란 소리다. 둘 다 전혀 아니기에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가끔은 웃음이 나오기도 하다. 장애인들과 활동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어떤 색깔을 내야 하는가?를 늘 고민한다. 음악이란 뭘까? 이론적인 건 모르지만 내면을 표현하는 방식 아닐까? 요즘은 장애를 가진 분들도 훌륭한 음악성을 가진 분들이 종종 있다. 장애 음악가들도 느끼고 표현하고 음악으로 소통한다. 하지만 기존의 음악은 장애를 고려해서 만든 게 아니기에 본인의 음악성을 온전히 전달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용인시에서 한때 추진하다가 유보된 ‘장애인시립오케스트라’는 발상만으로도 앞서가는 생각이었다. 물론 언젠가 누군가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내 생각엔 장애인들을 배려하기 보다는 기존 음악에 장애인들을 넣으려니 힘들었던 게 아닐까 한다. 또한 주변에서
[용인신문] 용인댁은 국악계에서 내게 붙여준 닉네임이다. 오래전 용인에 입성하려면 나를 거쳐야 한다(?)는 재미난 얘기들을 하곤 했다. 1960~80년대 국가 인간문화재인 선친 덕분에 인간문화재, 국악과교수, 저명인사들이 우리집 왕래가 많아 최고의 눈호강, 귀호강을 하며 살았었던 나는 용인에 처음와서 참으로 놀랐다. 평소 선친에게 들었던 민속촌이 있는 도시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척박한 문화예술 황무지였다. 민속촌 자문관계로 선친은 보성제 판소리 인간문화재인 정권진 명창등과 신갈에 거처를 두고 수시로 용인을 다니셨고 나중에 용인으로 가자고 늘 말씀하시곤 했다. 1998년 용인예술단을 창단했을 당시 용인 최초의 전문 국악단으로 이슈가 되었고 곧 시립국악단이 탄생할 줄 착각했다. 용인의 문화 예술인들은 참으로 인내심 많고 무던한 것 같다. 그들의 노력으로 꾸준히 달려왔고 문화재단이 생겨 용인시 전반에 걸친 문화 향유 수준은 향상되었으나 실제 예술인들에겐 큰 변화를 이끌어 내진 못한 것 같다. 2001년 녹야 국악단을 창단하고 용인시의 지원을 받아 매년 정기공연을 하며 국악 전문 단체로서 품격 있는 국악 관현악, 창극, 실내악, 가야금 앙상블 등의 멋진 연주로 성황을
[용인신문] ‘만들어진 신’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책의 집필 동기를 자신의 아내가 겪은 일화를 통해 설명했다. 어린 시절, 그의 아내는 학교를 몹시 싫어해서 차라리 퇴학당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그의 아내는 그 사실을 어머니에게 털어 놓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그런데 왜 그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니?” 라고 묻자, 그의 아내는 “그래도 되는 줄 몰랐어요.”라고 답했다. 나는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을 집필한 동기와 같은 동기로 이 글을 쓰고 있다.(물론, 주장하는 내용은 책 내용과 전혀 관계없다.) 추측하건대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수많은 사조와 이념들,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도덕과 관습들에 대해 한번쯤 불편함을 느껴봤을 것이다. 오랜 시간동안 많은 논쟁과 축적된 역사적 경험을 통해 체계화 된 도덕과 관습들은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통제한다. ‘신 앞에 단독자’라는 키에르케고르의 말은 구체적 삶의 정황 속에서 날마다 부정된다. 우리는 누구도, 어떤 순간에도 완벽하게 독립적인 개체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회로부터 강요된(혹은, 학습된) 삶의 방식에
[용인신문] 새해 1월에 소원을 빌며 해를 맞이할 장소를 물색하다가 뇌문비 이야기가 떠올랐다. 뇌문비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 말이다. 비는 용인시 역북동에 있는데 경기도유형문화제 76호로 지정되었다. 여기에는 조선시대 바른말을 하기로 유명했던 채제공이 죽자 정조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글이 각인되어 있다. 공식 이름은 채제공선생뇌문비(蔡濟恭先生誄文碑). 채제공은 사도세자 폐위가 논의될 때 죽기를 각오하고 이를 막았던 인물로 영조와 정조 모두에게 신임을 얻었을 뿐 아니라 탕평정치를 적극 돕기도 했다. 채제공의 행적에는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다. 백성들의 고단함을 더하는 조정의 결정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맞섰으며 평안함을 위한 일에는 당색을 가리지 않고 추진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를 추모하는 묘비는 소원을 들어준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뇌문비는 정조의 글이다. 채제공과 정조는 죽어서도 이 땅에 남아 21세기를 수호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묘소는 과거가 현재에 살아있는 공간이다. 묘소에 가면 무덤 주인의 과거를 추억하고, 그의 행적을 찾아보며 현실의 분주함으로 들떴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무덤을 지키는 석물들에 핀 이끼자국은 노인의 검버섯
[용인신문] 고등학생시절 4-H 클럽에 가입해서 봉사한다고 일요일이면 마을길 청소하고 꽃도 심고 방학 때면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퇴비를 했다. 또 겨울에 눈이 오면 마을길 눈 쓸던 기억이 난다. 그 때는 그냥 친구들과 다니며 봉사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깔깔 웃으며 어울려 다녔던 것인데, 어른이 되어서도 나도 모르게 봉사가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버렸다. 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 초반 4-H 봉사 활동한 것이 내 생애의 큰 보탬이 되었다. 봉사활동은 물론 영농활동, 인간관계 모든 면에서 생활의 지표였다. 그때 함께 활동했던 지인들과의 관계가 지금도 유지되어 용인시의 발전을 위해 좋은 의견을 나누며 활동하고 있다. 결혼해서 처음에 시어머니와 손아래 시누이와 함께 살았다. 처음 시골에서 축산을 하며 농사를 지을 때는 일이 힘들어서 밤에 울기도 많이 했다. 영농이 좋기도 하거니와 열심히 종사하다보니 농업인 후계자에 선정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것이 계기가 되어 농업에 종사하며 농촌의 지도자로 살고 있는 것이다. 시어머니께서 4년 넘게 병중에 계셨는데 지금 같으면 요양원으로 보낼 수도 있지만 그 시절에는 그냥 집에서 모든 수발을 들었다. 돌아가신 시어머니께는 아쉬운
[용인신문] 고요한 주말 아침, 연습실에 갑자기 실낱같은 해금 소리가 울려 퍼진다. 곧이어 두 줄, 세 줄 소리가 늘어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가야금, 판소리, 성악에 무용까지…적막했던 연습실은 각종 악기소리, 판소리, 아이들 소리로 넘쳐난다. 오롯이 전통 악기들을 그대로 배워가는 수업이 있는가 하면 전통을 주제로 다양한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수업이 전개된다. 직접 판소리를 작창하기도 하고, <내가 만든 용인노래 프로젝트>라는 전통 창의수업도 진행된다. 즉 ‘전통’과 ‘꿈’이라는 키워드로 아이들의 이야기가 가사가 되고 노래가 되는 모습이 재미있게 펼쳐진다. 매주 토요일 오전 9시부터 용인시문화예술원 연습실에 모여 각 파트별로 우리 전통예술을 배우고 있는 80여명의 초·중등학생들의 열정적인 모습이 마치 전통예술학교를 찾아온 느낌이다. 내가 처음 용인에서 청소년 국악교육을 시작한 것이 7년 전, 문화체육관광부 지원 사업으로 청년 국악인 8명과 함께 전국 초중등학교 순회공연을 다니면서였다. 그때 찾아간 학교가 갈곡, 매봉, 홍천, 둔전, 신갈중학교 등이었다. 처음 국악공연을 본 아이들의 반응은 “너무 재미있어요.”부터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아요.”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