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동주의 마음속에는 무수한 격랑이 일건만 좀처럼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24쪽) 시인 윤동주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파도는 순수에 대한 지향 때문인가, 부조리한 세태 속에서 살아내야 하는 예술인으로서의 양심일까. 그의 마지막 삶 속에서 무엇을 열망했는지 짐작은 할 수 있으리라. 『시인 동주』는 예술가 윤동주의 생애에서도 후반부를 그린 소설이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쓴 소설이지만 배경을 훑어가다 보면 대상의 문제가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소설 속에서 연희전문에 입학한 윤동주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용정에서 기울어가고 있었던 집안을 위해 의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권유도 뿌리치고 시인이 되고자 했던 윤동주의 모습은 무기력한 예술가와는 거리가 멀다. 일제의 탄압 앞에서 변절에 앞장서는 문인들을 보며 절필하기로 마음먹은 동주. 마태복음에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함을 받을 것이오”라는 구절 대신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를 여덟 번이나 쓰고도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라고 하는 동주의 시심은 처절하다. 2년 징역을 선고 받고 감옥에서 어머니를 그리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떠올리며 죽어가는 동주의 마지막은 비장하다. 『시인 동주』는 윤
[용인신문] 정세랑의 역사소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는 신라시대 설자은을 주인공으로 하는 미스테리물이다. 설자은은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남장 여성이다. 그의 뛰어남을 알아본 오라비의 계획이었다. 그의 귀국길에 함께 한 목인곤과 짝을 이뤄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설자은이 미스테리를 푸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우선 그의 생각과 행동에 섣부른 힘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설자은은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을 숨겨야 하는 입장이라 타인의 눈에 띄는 것을 피하는 편이다. 힘 있는 사람의 눈에 들어 출세를 바라는 자은의 오라비와 사뭇 다르다. 그는 폭넓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문제를 바라본다. 설자은이 당에서 만난 사람들은 상하고하를 막론하였을테니 사건을 맡긴 이가 왕이나 상대등처럼 범접할 수 없는 이들이라 하더라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게다가 당나라에 유학을 하되 다른 권세가의 자식들처럼 호사를 누리는 대신 스스로 비용을 충당해 가며 공부를 했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도 스스로에 대한 믿음도 있는 인물로 보인다. 설자은의 추리는 답답한 요즘 세태에 청량감을 준다. 옴리버스처럼 나열된 사건들은 단편소설처럼 즐길 수도 있다. 작가가 &
[용인신문] 불확실하고, 상대에 따라 견고함이나 형상을 달리하는 벽(684쪽). 지독히도 관계를, 인간의 내면을 상징하는 언어와 사건으로 엮은 소설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다. ‘나’와 ‘너’가 대화 속에서 구축한 도시는 형상이 있으나 표현할 수 없으며, 아무나 드나들지 못하고, 그곳에 갈 때는 그림자를 버리고 들어가야 한다. 특별한 사건보다는 인물의 심층적인 내면을 느린 속도로 세밀히 탐색해 나가는 과정이 중심 서사이다. 깊은 탐색 과정으로 인해 작가의 다른 소설보다 고요한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벽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움직인다. 10대의 강렬한 만남은 한 남자를 40대 중반이 되도록 정처를 찾지 못하게 만들고, 그 공허를 해소하지 못한 남자는 어느 날 갑자기 벽 안에 도착한다. 벽 안에서의 삶에서 별다른 의미를 찾지 못한 남자는 또 어느 순간에 벽 바깥에 있음을 감지한다. 소설은 남자의 시선을 따라가며 현실과 비현실을 오버랩시키며 독자를 혼돈에 빠지게 만든다. 뉴스에 등장하는 전쟁 혹은 정쟁, 범죄, 사건과 사고 등의 범람은 저마다의 사람들이 견고한 성을 짓게 만들고 그 속으로 침잠하게 만든다. 주인공이 벽에 들고 나는 방법
[용인신문] 어느 학자는 미래 사회에 부의 척도가 생물다양성이 될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다양한 생물이 사는 환경이라면 인간도 쾌적한 환경을 제공받을 수 있으리라는 예측 때문이었다. 『어반 정글(URBAN JUNGLE)』은 생물 다양성이 보장되는 지역이 도시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위를 갖는지 보여준다. 도시 경계가 확장되면서 도시와 농촌 사이의 구분이 모호해 지고 있다. 경계를 부르는 이름도 “경계, 둘레, 도시와 야생의 접점, 데사코타, 경계 불분명 지역, 인터존, 전원도시, 근교도시, 교외 주택지, 테란바그, 배후지, 도시가 자연과 충돌하는 지점”(23쪽)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어반 정글』은 이 곳의 생물 다양성에 관심을 갖는다. 잘 가꾸어진 정원보다 어수선해 보이지만 오히려 다양한 생물이 어울려 지내고 있으며 여러 예술가들이 이곳의 가치를 일찍부터 발견했음을 근거로 들고 있기도 하다. 뉴욕에서 나오는 50년간의 쓰레기가 묻힌 곳, 9·11 테러의 잔해를 마지막으로 묻는 프레시 킬스는 10여년간 공을 들여 환경을 복원한 곳이다. 뉴욕시는 공학의 힘을 빌어 유독물질을 차단하고, 풀밭을 가꿔 생물이 찾아오는 곳으로 만들었다. 복원의 마지막 역할은 자연이 맡
[용인신문] ‘처음’이라는 말은 두근거림을 품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책임감이나 용기와 같은 어려움을 감내해야 하는 일도 있다. 『첫눈』은 어쩌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품고 있는 그림책이다. 이 그림책은 이란의 엘함 아사디 작가가 고대 페르시아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옛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이야기이기도 하다. 몇몇 유명한 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이야기가 엮어낸 즐거움과 그림이 주는 감동, 책의 크기가 주는 경이감과 어우러지는 하나의 통합 예술로작품으로서 감동할 만한 책이다. 이야기의 바깥은 할머니와 소녀의 대화이다. 소녀는 할머니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결국 결말이 다른 수천의 이야기를 가진 할머니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할머니의 겨울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여름인데도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안쪽 이야기는 나네 사르마라는 여인이 기다리는 노루즈의 이야기이다. 사르마는 눈과 비와 우박을 세상에 보내는 여인이고 매일같이 노르즈를 기다린다. 사르마가 노루즈를 만나 행복한 결말을 맺을 수 있을까? 사르마가 잠든 사이 다녀간 노르즈. 사르마도 독자도 안타깝게 여길 만한 부분이다. 사르마는 다시 기다린다. 물론 눈물을 흘리긴 했다. 하지만 “영원히 슬프지만은 않”
[용인신문] 대중은 쿠웬호벤(William Kouwenhoven)이라는 이름이 낯설지만 그가 고안한 인공호흡은 많이 알고 있다. 버나드 라운(Bernard Lown M.D.) 역시 낯설다. 그는 심장 제세동기를 만든 의사이자, 개발 도상국의 의사들이 최신 의술정보를 접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1985년 노벨평화상 외에도 명예로운 다수의 상을 받았다. 도서는 저자의 화려한 수상 내역보다 그가 ‘치유자’로서 얼마나 위대한 길을 걸었는지에 대한 감동을 전하고 있다. 저자는 현대 의학기술은 나날이 발전하는 데 비해 사명감이나 의사에 대한 존경심은 나날이 추락하고 있다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어떤 의사는 치유보다는 의료소송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혹은 더 큰 이득을 위해 환자에게 치료보다 불필요한 검사와 치료를 한다고 한다. 저자는 심리상태와 병증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기술한다. 불만으로 가득한 주변 환경이나 가족관계가 병을 만들어 오는데 심지어 뮌하우젠 증후군처럼 건강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큰 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실제 그러한 증상을 드러내는 환자들도 있다는 것이다. “치유를 위해서는 예술과 과학이 동시에 필요하며 신체와 정신을 함께 살펴
[용인신문] 아버지 올라이는 아들이 무사히 태어나길 소망했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빌어 요하네스라는 이름도 준비했다. 산고를 겪는 아내에게 달리 건넬 말도 없었고 태어난 아기에 안도하는 엄마는 “응”, “그래” 정도의 말을 할 뿐이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요하네스는 생각한다. 그러나 물건들은 지금까지 해온 일들로 인해 무겁고, 동시에 가볍다” 생각 외 달리 할 일도 없었다. 태어난 아들 요하네스는 나이 들어 자식을 낳았고 이제 노년을 맞는다. 여느 때처럼 일어났는데 그날은 이상하다. 이발을 해주던 페테르도 신실했던 구두장이 야코프도 유명을 달리했다. 그래도 여전한 매일을 살던 요하네스. 하지만 그날따라 다른 날과 다르다. 요하네스는 다른 날과 유난히 다른 날 생각을 멈추지 않고 계속 했다. 친구들도, 아내 에르나도. 소설에서 생각은 반복된다. 올라이의 지금에 대해서, 요하네스의 지금에 대해서, 그리고 페테르와 요하네스의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추억에 대해서. 요하네스의 막내 싱네도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친다. 이제 영혼으로 밝혀진 요하네스와 페테르 역시 자신들이 향하는 곳에 대해 깊이깊이 또 생각한다. 이처럼 반복되는 상념들의 열거가 이 소설의 중심축이다.
[용인신문] 두 개의 인생이 있다. 하나는 “네가 아는 인생”, 다른 하나는 “오래전부터 너를 기다리고 있는 인생”(55쪽). 선택은 어느 쪽이어야 할까? 앨리스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난 점쟁이의 말에 자신의 앞집에 사는 화가 달드리와 무작정 튀르키예로 떠난다. “진실? 맙소사, 미래는 대리석에 새겨져 있는게 아냐. 너의 미래는 너의 선택으로 이뤄지는 거니까.”(55쪽) 떠나는 것을 망설이는 앨리스에게 점술사가 하는 말은 작가가 독자에게 직접 하는 말이나 다름 없다. 소설의 배경은 1950년대, 비행기 여행보다는 기차여행이 더 익숙한 시대이다. 소식은 전보나 편지로 전하던 때에 공간과 시간이 어긋난 편지도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든다. 점술사의 말을 듣고 여행을 떠나는 독특한 소재의 이야기는 인물이 기억하는 냄새, 거듭되는 악몽, 기시감, 붙이지 않는 편지 같은 이야기들이 한데 어우러져 작품 초반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한다. 작품은 앨리스가 만나야 할 여섯 인물을 헤아리며 그 끝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 예측해 보는 것도 소설을 읽는 재미이다. 조향사 앨리스는 전쟁 중 눈앞에서 부모를 잃었고 지독한 고독 속에서 현실을 살아내며 예언보다는 우연을 믿는 편이다. 앨리
[용인신문] 문화가 점점 공동체에서 멀어진다는 철학자의 말을 누가 믿을까? 문화는 공동체를 뿌리로 하는데 이익이 없으면 언제든 버리는 대상은 아닐 것이다. 이걸 조금 더 체계적이고 진지하게 고민한 철학자가 한병철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디지털 시대가 되면 보이지 않는 가치가 사라지는 대신 모든 것이 상품처럼 소비되어 사라진다는 문제를 지적한다. 디지털 안에서 ‘너’는 ‘그것’이 되기 때문에 인간은 고독하다. ‘그것’은 내 앞에 관계의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기에 소멸해 버리기 때문이다. SNS에 전시한 셀피는 현실의 고요를 몰아내지만 사유를 만들지는 못한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진정한 앎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만든다. 경탄도 의심도 없다. 들뢰즈에 의하면 철학은 “바보처럼 굴기”에서 시작한다는데 “인공지능은 너무 지능적이어서 바보일 수 없다. 결국 사물들은 디지털화 되자 폭발적으로 더 커졌지만 오히려 가치를 점점 잃어간다. 저자는 잃어버린 것을 장미와 어린 왕자의 시간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인간이 잃은 것은 어린 왕자가 장미와 친구가 되기를 예로 설명하기도 한다. 왕자와 장미의 결속이 디지털 세계에서는 점점 사라진다는 말이다. 고요함은 또 어떠한가. 이런 식이면 상
[용인신문] 이상하다. 아름답다. 하지만 힘들어서 어쩌면 판타지가 될 수도 있겠다 싶은 실험적인 일이다. 이는 남해로 간 청년들의 이야기이다. 폐교를 세내어 “팜프라촌”을 세우고 그곳에서 필요한 기술을 익혀 시골 생활의 가능성을 모색해 나가는 프로젝트. 2017년 청년 둘이서 꾸린 팀을 시작으로 여전히 또 다른 도약을 꿈꾸는 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도서는 어쩌다 촌에 청년들이 모였는지를 시작으로 어떻게 터전을 마련하고 먹거리와 잠자리를 마련했는지, 생계를 위해 어떤 도전을 했는지 소개한다. 평안해 보이는 마을 사진에 비해 청년들의 일터는 땀내가 진하게 배어난다. 청년들의 삶은 환경친화적이다. 농작물은 농약을 이용해 쉽게 키우지 않는다. 농작물을 갉아먹는 달팽이를 손으로 잡으며 텃밭을 지키고자 하지만 쉽지는 않다. 마을 어르신들의 도움은 청년들은 촌 라이프에 수십년의 노하우를 짧은 기간 안에 경험하게 한다. 코로나로 미리 준비한 유채꽃 축제를 열지 못했을 때 유채를 배달한다는 아이디어로 성공적인 촌의 삶에 희망을 갖기도 했다. 팜프라촌 청년들은 자신들의 시골 생활에서 어떤 것도 쉽게 얻지 못했다고 말한다. 청년들은 양아분교에 세운 팜프라촌을 포기해서 프로젝
[용인신문] 한 사회의 이야기는 그곳의 문화가 된다. 직조된 문화는 유기체와 같아서 생로병사의 길을 걷는다. 당연히 이야기도 변한다. 이야기가 적체되면 그 사회는 갈등이 심화되고 역사가 후퇴하기 마련이다. 옛이야기가 변해야 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가치관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리베카 솔닛은 이를 아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재투성이 신데렐라가 유리구두를 신고 왕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는 옛이야기는 지금의 우리에게 더 이상 희망을 주는 판타지가 아니다. 못된 새엄마와 새언니 덕에 불쌍해진 신데렐라는 자기 인생의 주인도 될 수 없다는 부정적 의미를 품은 인물이라는 평가까지 듣고 있다. 자신의 능력보다는 왕자의 지위에 의존해서 성공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리베카 솔닛이 재창조한 신데렐라는 그래서 다르다. 주인이 되며 언니들과 화해하는 인물이다. 불쌍한 신데렐라는 리베카 솔닛에 의해 ‘해방자’로 불리게 된다. 신데렐라가 유리구두를 신고 마법요정의 도움으로 무도회에 간다는 과거의 판타지는 그대로 품고 있긴 하다. 하지만 호박마차를 호위하던 동물들도, 결혼을 위해 유리구두를 들고 온 나라를 헤매던 왕자도 화려한 궁전의 삶만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해방자 신데렐라는
[용인신문] 혹자는 첫사랑은 마음속에 간직할 때에만 아름다운 것이라 주장하지만 프레야 심슨의 소설 속 주인공은 60년째 첫사랑을 찾아다닌다. 88번 버스에서 만난 ‘그녀’를 찾기 위한 프랭크의 이야기 『88번의 기적』은 2010년 뮤지컬 공연을 영화로 리메이크 했던 ≪김종욱 찾기≫와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 속 초록초록한 사랑이 생각나게도 한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과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있다. 프랭크가 ‘그녀’를 만난 것은 88번 버스에서였다. 첫눈에 둘은 사랑에 빠지고 빨간 머리의 ‘그녀’는 버스표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어 주고 내린다. 안타깝게도 프랭크는 그녀의 메모를 잃어버리고 60년 동안 88번 버스를 타게 된다. 그녀와의 만남에 인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나 프랭크는 치매 진단을 받고 요양원에 들어가면 버스도 타지 못할 위기에 처하는데…. 프랭크가 버스에서 만난 리비는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부모의 간섭으로 꿈도 잃은데다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직장까지 잃은 리비에게 프랭크의 첫사랑 찾기는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소설은 펑크족을 표방하는 프랭크의 요양보호사 딜런과 온 동네 참견쟁이 페기가 등장하며 흥미를 더한다. 소설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