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궁리의 연기를 보면 그냥 우러나오는 것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녀는 빼어난 미인도 아니다. 덧니도 배우가 되고 나서 ‘치아교정’을 하였다. 궁리가 1987년 붉은 수수밭(紅高粱)으로 데뷔했을 때 관객은 그녀의 원시적인 아름다움에 감탄했고 신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뛰어난 연기력에 놀랐다. 궁리는 동서양을 통털어 연기력만 놓고 보면 첫손가락에 꼽힐 만큼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다. 할리우드 여배우 중에 궁리에 버금가는 연기자를 꼽으라면 ‘메릴 스트립’정도를 들 수 있다. 메릴 스트립의 연기도 훌륭하지만 궁리를 넘어서지는 못한다. 궁리의 연기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다. 베네치아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과 볼피컵 최고 여자연기상을 받은 ‘귀주이야기’(秋菊打官司)를 보면 그녀는 그냥 산골 여인이다. 눈을 씻고 봐도 배우가 연기하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 제목이 귀주이야기가 된 사연이 기막히면서도 재미있다. 영화에서 궁리는 고추농사를 짓는 산골 새댁 추쥐로 나온다. 당시 외신으로 들어온 베네치아영화제 뉴스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영문 제목인 The Story of Qiu Ju를 한어 병음 표기인 귀주로 읽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다. 영화의 원제목은 ‘추쥐
[용인신문] 제인 캄피온은 여류 감독으로 사상 최초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뉴질랜드 출신의 감독이다. 제인 캄피온은 1982년 그의 첫 단편영화 ‘필’로 황금종려상(단편부문)을 수상했지만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1993년 피아노(The Piano)로 장편 부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부터다. 제인 캄피온은 1996년 ‘헨리 제임스’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여인의 초상’을 발표했다. 감독은 2021년 ‘파워 오브 도그’(The Power of The Dog)로 제93회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다. 여류감독으로 또 한 번의 역사를 쓴 것이다. 영화계에서 여류 감독을 찾기란 해수욕장에 떨어진 100원짜리 동전 찾기만큼이나 어렵다. 특히 거장의 반열에 오른 여류 감독을 찾기란 더 어렵다. 여성이 남성보다 더 상위인 시대라고 흔히 말하지만 여성과 남성이 평등해지려면 아직 멀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도 여성에게는 여전히 ‘넘사벽’이다. 오죽하면 가상의 인물이 보수적이기로 첫손가락에 꼽히는 베를린 필하모니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나오는 ‘타르’라는 영화가 만들어졌을까? 제인 캄피온은 여류 감독에게 특히 가혹한 영화계에서 스스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 입지전적인
[용인신문] 클린턴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니어(1930.5.31.~)는 배우이자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본명이다. 이름이 무척 길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별 볼 일 없는 배우였다. 그가 이름과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이탈리아 영화감독 ‘세르지오 레오네’의 이른바 스파게티 웨스턴 무법자 3부작이 성공하면서부터다.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 석양의 건맨으로 대표되는 무법자 3부작은 기존 정통 서부극의 뿌리를 뽑아 버렸다. 할리우드는 보안관과 카우보이는 정의롭고 인디언은 야만적이고 백인 아녀자를 겁탈하고 아이들을 죽이는 악당으로 묘사했다. 이것은 백인 우월주의를 확산시키고 아메리카의 역사는 개척의 역사라는 허상을 심어주는 고도의 프로파간다(선전/상징조작)였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무법자 시리즈로 얼굴을 알리고 ‘더티 해리‘로 확고한 톱스타의 반열에 올라섰다. 할리우드의 비주류 배우에서 주류 배우가 된 것이다. 그런데 정작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위대한 인물로 만든 것은 배우가 아니라 영화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배우와 영화감독을 겸업하면서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 용서받지 못한자(1992),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
[용인신문] 그레이스 켈리(1929~1982)는 은막의 백조로 혜성같이 등장하여 할리우드의 간판스타가 되었다가 모나코의 왕비가 되면서 영화계를 은퇴한 불멸의 스타였다. 20세의 나이로 연기 활동을 시작한 그레이스 켈리는 1953년 클라크 게이블, 에바 가드너와 공연한 <모감보>로 영화에 데뷔했다. 할리우드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그레이스 켈리의 등장에 열광했다. 그녀는 영화 데뷔 2년 차인 1954년 ‘회상 속의 연인’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비롯해 5편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였으며, 골든 글로브상을 수상했다. 26세인 1956년 모나코의 레니에 3세와 결혼하면서 영화계에서 은퇴하였다. 모나코 대공비(왕비)가 된 그녀는 유럽의 사교계를 주름잡는 대표적인 왕실 인사가 되어 일거수, 일투족이 뉴스가 되었다. 그녀는 현재 모나코의 대공인 알베르와 카롤린, 스테파니 공주 3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녀의 결혼생활은 외견상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1982년 9월 13일 막내이자 둘째 딸 스테파니 공주가 운전하던 자동차를 타고 프랑스로 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다음날 사망했다. 차를 몰았던 스테파니 공주는 살아남았다. 그레이스 켈리의 충격적인 죽음은 숱한 음모론
[용인신문] 니콜 키드먼은 180cm에 달하는 장신에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피부가 투명해 보일 정도로 맑은 여배우이다. 한때는 톰 크루즈의 아내로 불렸으나 니콜 키드먼은 이혼 후 독자적으로 우뚝 선 연기자이다. 니콜 키드먼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이혼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녀가 이혼하게 된 것은 톰 크루즈의 강요에 의해서였다. 톰 크루즈는 사이언톨리지교 신자로 니콜 키드먼에게 개종할 것을 강요했고 심지어 그녀가 임신하자 다른 남자의 씨로 오해하여 낙태를 강요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이혼 후 니콜 키드먼이 침묵을 지키다가 그녀에게 비난이 집중되자 사실을 밝힌 것이다. 톰 크루즈는 170cm로 니콜 키드먼보다 무려 10cm나 작다. 니콜 키드먼은 톰과 결혼 생활 중에는 하이힐을 신지 못하였다. 이혼 후 그녀의 일성(一聲)은 ‘이제 마음 놓고 하이힐을 신을 수 있게 됐다’는 말이었다. 니콜 키드먼은 1967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태어나 1983년 호주에서 연예계에 데뷔했다. 1996년 <투 다이 포>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2001년 <물랑루즈>로 아카데미상 노미네이트, 2002년 <디 아워스>에서 버지
[용인신문] 20세기를 대표하는 명감독, 명배우 한 명을 꼽으라면 단연 찰리 채플린(1889~1977)이다. 찰리 채플린은 무려 75년간이나 현역으로 활동하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무성영화 시대의 찰리 채플린은 1919년 메리 픽퍼드,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D.W. 그리피스와 함께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를 설립하여 자신의 영화를 제작·배급할 조건을 갖추었다. 그는 최초의 장편영화인 키드(1921)를 시작으로 파리의 여인(1923), 황금광 시대(1925), 서커스(1928)를 발표하고 1926년 유성영화 시대가 개막되자 이를 혐오하여 무성영화를 고수했다. 시티 라이트(1931), 모던 타임스(1936)는 무성영화로 유성영화를 압도한 걸작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특히 모던 타임스는 자본주의 대량생산 체제가 갖춰지면서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노동자의 신세를 풍자하여 발표된 지 90년이 지난 지금까지 불멸의 걸작 영화로 평가받고 있다. 모던 타임스를 발표하면서 찰리 채플린은 자본가들이 기피하는 영화인 제1호가 되었고 FBI의 감시대상에 올랐다. 모던 타임스 이후 찰리 채플린은 정치적인 문제에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여 1940년 아돌프 히틀러를 풍자한 ‘위대한 독재자’
스웨덴 출신 ‘잉그리드 버그만’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여주인공 맡아 열연 스타덤 [용인신문] 잉그리드 버그만(1915~1982)은 스웨덴 출신의 배우로 175cm에 달하는 큰 키, 금발벽안(金髮碧眼)의 미인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1940년대 할리우드는 잉그리드 버그만이 대표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녀의 인기는 대단했다. 비영어권 출신 배우가 할리우드를 대표했던 사례는 그레타 가르보(1905~1990), 마를레네 디트히리(1901~1992)가 있지만 잉그리드 버그만의 인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통산 아카데미 여자연기상 후보 지명 7회에 3회를 수상하고, 에미상 2회 수상, 토니상을 1회 수상했다. 그녀는 영화, TV, 뮤지컬 부문의 3관왕을 달성할 정도로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였다. 그녀는 1939년 할리우드 버전의 <인터메조>를 ‘레슬리 하워드’와 공연하면서 미국 영화계에 입성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1941) 이후 변변한 출연작이 없던 잉그리드 버그만은 1942년 대표작인 <카사블랑카>의 대성공으로 할리우드 톱스타의 위치를 구축하게 된다. 이어서 1943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동명소설 ‘누구를 위
[용인신문] 명감독, 명배우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코너를 신설했다. 이 코너는 고전영화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명감독과 명배우를 소개하여 독자의 문화생활을 돕고자 하는 취지로 마련된 것이다. 감독과 배우의 소개는 시대순이 아니라 무작위로 소개하기로 한다. <편집자 주>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 무성영화부터 활약 러 대표 감독 ‘전함 포템킨’ 몽타주 기법 선보여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은 무성영화 시대부터 활약한 러시아를 대표하는 감독이자 영화를 전공하는 학생은 필히 공부해야 하는 세계적인 감독이다. 1925년 감독이 발표한 <전함 포템킨>은 몽타주 기법을 최초로 선보인 무성영화다. 몽타주 기법은 따로 촬영한 필름을 이어붙이는 것으로 프랑스어로 ‘조립(組立)’이라는 뜻이다. 감독은 유명한 오데사 계단에서 유모차가 구르는 장면을 몽타주 기법으로 편집하여 영화사의 신기원을 개척했다. 예이젠시테인 감독의 대표작은 알렉산드르 넵스키(1938)와 이반 뇌제(1944)가 있다. 이반 뇌제는 1부와 2부로 나뉘어 촬영했는데 2부는 스탈린을 풍자한 내용이 포함되어 감독과 스탈린이 모두 사망한 뒤인 1958년에 발표되었다. 춘사(春史) 나운규 감독·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