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인터뷰 – 용인시장 출마예정자에게 듣는다> 대담: 용인신문 김종경 발행인/대표 용인특례시 미래 운명 좌우 중요시기 인구 증가·개발 등 외형적 성장에도 내실 다지지 못해 현안 여전히 숙제 110만 경제 자족도시 도약 견인 자신 Q. 정치는 언제부터 시작했나? 주요경력과 근황은? = 현재 용인시의회 의원으로 12년 동안 시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용인대학교 객원교수로 부족하나마 제 경험을 후학들에게 설명하는 자리도 갖고, 지난 대선 때는 중앙당 부대변인으로 우리 후보와 당의 정책과 비전을 알리고자 고군분투했다. 주요경력은 제8대 용인시의회 전반기 의장을 역임했다. 수지구축구협회 회장과 수지중앙라이온스클럽 회장, 수지신용협동조합 감사로 활동했으며, 용인시 규제개혁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지금은 용인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용인시장 출마 선언 후 준비에 여념이 없다. Q. 2010년부터 3선 의원을 지낸 현 시의회 의장이다. 용인시장 출마의 변은? = 이번 지방선거가 향후 110만 용인특례시의 운명을 바꾸는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다. 반도체 클러스터와 플랫폼시티가 완공되면 대전환의 시발점이 될 것이며, 특례시 승격에 맞춰 대전환에
[용인신문] 40여 일 앞으로 다가온 6·1 지방선거 출마예정자들이 총성 없는 전쟁 중이다. 유권자들은 건물에 걸린 대형 현수막과 거리 인사를 하는 후보들밖에 볼 수 없지만, 선거전은 이미 물밑에서 치열한 상황이다. 입후보예정자들은 본선에 앞서 1차 관문인 경선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의원 정수가 상대적으로 많은 기초의원 선거의 경우 우선순위의 공천만 받아도 사실상 당선증이나 마찬가지다. 경선에서 탈락하면 출마 기회를 박탈당하니 본선보다 더 치열할 수밖에 없다. 물론 무소속 출마도 가능하지만, 당선 확률이 낮아 공천을 희망하고 있다. 도지사나 시장 선거는 정당 싸움이다 보니 공천과정부터 치열하다. 서울시장이나 경기도지사는 여야 모두 기 싸움부터 뜨겁다. 정권의 명운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특히 관심이 집중된 곳은 용인시를 비롯한 수원, 고양, 창원 등 4곳의 첫 번째 특례시장 선거다. 그중에서도 유독 용인시장 출마예정자가 많아 눈길을 끌었다. 정권교체로 당선 가능성을 크게 본 탓인지, 국민의힘 용인시장 후보 공천신청자만 15명이었다. 중앙당 면접 전에 2명이 사퇴했고, 1차 컷오프 후엔 3명으로 최종 압축됐다. 쏠림현상이 두드러진 국민의힘 후보
[용인신문] <인터뷰 – 용인시장 출마예정자에게 듣는다> 대담: 용인신문 김종경 발행인/대표 경찰 요직 두루 거치고 정치 입문 지역주의 타파위해 지방선거 출마 종합운동장 공원화 민의수렴 소홀 도전·창업 열기 가득한 도시 만들터 Q. 경찰 고위직 출신이다. 정치는 언제부터 시작했나? 주요경력은? = 경찰을 그만두고 총리실에 민정실장으로 들어갔다. 다시 대구로 내려가 민주당에 입당한 게 2018년 1월이다. 정치한 지 4년 좀 더 됐다. 주요경력은 경찰대학 5기 졸업(수석입학), 홍콩/런던 경찰영사,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 대구/부산 경찰청장, King’s College London 석사, 국무총리 민정실장, 동국대학교 경찰학 박사, 문재인 대구/부산공동선대위원장, 제34회 행정고등고시, 이재명 법률지원단 부단장 등이다. Q. 정치에 입문한 계기와 민주당을 선택한 이유는? = 2016년 9월 나이 50에 공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제2의 인생을 시작해야 하는데 오로지 공공영역에서만 일해왔다. 그때 마침 촛불 혁명이 시작되었고 반성과 성찰을 통하여 시대와 역사에 눈을 떴다. 삶을 바꾸는데 정치 만한 게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정치를 결심
급격한 도시화로 ‘특례시’ 비약전 발전 현 시장 난개발 우려 4년 동안 허송세월 공무원 유능하지만 기관장 무능·무개념 용인시 백년대계 최고의 도시 육성 계획 [용인신문] Q. 용인시 고위 공직자 출신이다. 주요 경력과 근황은? = 1979년 당시 용인 군청에서 원삼면으로 발령받아 2018년 도시정책실장으로 명예퇴직할 때까지 약 40년 동안 용인시를 위해 일했다. 9급에서 2급까지 전국 지방자치단체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최연소 국장 승진(만47세)과 경제산업국장, 도시주택국장, 건설교통국장, 건설사업단장 등 최장기간 국장재직(10년)으로 맡은 바 책임과 의무를 다하였고, 지방 이사관(2급)으로 명예롭게 퇴직하였다. 퇴임 후 시장 출마 준비와 취미로 한국 전통서각을 배웠고 초대작가로 전시회까지 했다. Q. 공직 재임 당시 시 공직사회 내에서 호남 출신 대부로 불려왔다. 보수성향 정당을 선택한 이유가 있는가? = 88년 즈음해서 용인 호남향우회가 처음 만들어질 때 가입하고 호남 출신 공직자 후배들이 많아 몇 명이 모임을 하다 호공회라는 명칭으로 공무원 모임을 만들었다. 대부까지는 아니고 나이나 직급이 조금 위다 보니 따르는 후배들이 많았다. 보수성향 정당을 택한
원외 위원장 한계 극복 지역민원 해결사 보수 험지 기흥서 윤석열 지지 이끌어내 젊은피로 구태의연한 기성정치와 결별 ‘시민펀드’ 도입해 개발이익 시민과 공유 [용인신문] Q. 지난 2020 총선에서 용인지역에 처음 이름을 알렸다. 그간의 근황은? = 총선 이후 용인을 당협위원장으로서 지역주민들에게 다가가고 당의 외연을 넓히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대선에서의 국민의힘 지지율을 2년 총선 때보다 10% 추가로 올리게 되었다. 원외 위원장임에도 불구하고 통학로 확보나 소음, 악취문제, 관내 사업 시예산 확보 문제 등 지역 시의원과 힘을 합쳐서 지역의 크고 작은 이슈의 해결사 노릇 자처했다. 무료급식소, 환경 정화 활동 등 정기적으로 지역봉사를 하고 ‘프로젝트 제로 봉사단’을 자체적으로 발족하여 활동했다. Q. 총선 이후 2년 만에 용인시장에 출마하는 이유는? = 당협위원장으로서 대선도 성공적으로 치르고 보람도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정치구조와 특성상 당협위원장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 정치적 특성에 따라 현역의원들조차도 지역 예산을 비롯 활동하는 것이 만만찮다고 생각된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당협위원장을 맡아서 주민들을 만나고 애로사항을 청취하
[용인신문] 매일 아침 체크 해온 것이 국내외 코로나19 발생 현황이다. 확진자와 사망자 추이를 보면 주식시장보다 더 변화무상하다. 예측 가능한 ‘변이’라는 또 하나의 변수 때문에 모든 속단은 금물이다. 이제 전문가들은 최고점을 찍고 내려오는 중이라지만 불안감은 여전히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바이러스 세력들이 대체로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하락장의 숫자뿐이다. 2019년 말 최초 발견된 코로나19는 2020년 초 하루평균 한 자릿수에 불과했던 것이 2년여 만에 100만 명(잠정 집계)에 육박했다. 지금은 분명 급하강 추세를 보이기 시작했지만 4월 초인 현재 30만 명을 오르내리고 있다. 이런 숫자는 처음엔 상상조차 못 했지만, 치사율이 떨어지면서 초창기의 극심한 공포감은 상당 부분 사라졌다. 전 세계에서도 백신 접종률이 매우 높은 우리나라는 사회적 거리 두기 완화와 함께 노마스크에 대한 기대가 크다. 이미 많은 나라가 제한을 풀면서 해외여행까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전으론 절대 돌아갈 수 없다고 확신한다. 마스크 착용 의무나 사회적 거리 두기는 사라질지 몰라도 ‘포스트 코로나 시대, 우리 앞에 다가온 역사의 변곡점’은 절대 과거로
[용인신문] Q. 용인에서 4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주요경력과 근황은? = 주요경력은 미래한국당 대표, 자유한국당 사무총장, 한나라당 대변인,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장, KBL 한국프로농구 총재 등을 역임했다. 약 2년 전 제21대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용인지역을 지켜보는 시간을 가졌다. Q. 2020년 총선 불출마 선언과 함께 사실상 정계은퇴 의사를 밝혔다. 이후 자유한국당(현 국힘)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 대표 역임하기도 했지만, 다시 현실 정치에 나선 이유는? = 국회의원은 정치인, 지자체장은 행정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불출마 선언을 하고 약 1년여 동안 시장직 도전에 대한 준비보다 고민을 많이 했다. 중앙정치에서 보고 배웠던 행정적인 경험을 19년 살아온 용인에 쏟아붓는다면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16년 동안 한 지역의 국회의원을 만들어 주신 것에 대한 봉사가 아닌, 보답으로써 이번 출마를 결심하게 됐다. Q. 박근혜 전 대통령이 사면됐는데 정치적 연계성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닌지? = 박 전 대통령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다. 이제는 홀로서기를 해야 할 정도의 경험치를 쌓았다고 생각한다. Q. 용인시장에 도전하는 이유는? =
[용인신문] Q. 중앙지 기자 출신 정치인이다. 정치에 입문한 이유는? =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측이, 4년 뒤 17대 총선 때엔 최병렬 대표 측이 정치를 권유했다. 그러나 언론인으로 계속 활동하겠다며 고사했다. 2006년 1월 중앙일보 워싱턴특파원으로 부임하기에 앞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이듬해 대선 준비 차원에서 도와달라고 했으나 사양하고 미국 워싱턴으로 가서 3년 6개월 간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귀국해서 약 2년간 중앙일보 정치부장으로 일한 뒤 논설위원으로 있을 때인 2012년 3월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19대 총선 중앙선대위 대변인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25년 가량의 언론인 생활을 마감하고 정치에 뛰어드는 게 좋은지 고민하다 6년 전 박근혜 당시 대표의 부탁을 뿌리친 데 대한 미안함, 2012년의 경우 총선에 이어 대선까지 치러야 하는 정치적 상황의 엄중함을 고려해서 대변인직을 수락했다. Q. 2016년과 2020년 총선 당시 용인지역 선거구에서 연속 출마했다. 2년 만에 용인시장으로 노선을 바꾼 이유는? = 19대 국회의원 시절인 2014년 용인 기흥의 용인을 당협위원장을 맡았고, 시민들과
[용인신문] 용인시 전역을 돌아볼 때면 아쉬움과 놀라움이 교차할 때가 많다. 급속한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빠른 도시발전과정이 정상인지 의구심마저 들기도 하지만 자칫 급조된 도시공동체의 전형이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난개발 오명 때문에 아파트 분양도 힘들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용인은 수도권의 핫플레이스로 부상했다. 지난 대통령선거 결과에서도 보았듯이 이미 강남 수준에 버금가는 지역들도 꽤 있다. 최고급 브랜드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고, 전국에서 인재들이 몰려들 정도로 살기 좋은 곳이 용인이다. 예로부터 ‘사거용인’이라고 했지만, 이젠 ‘생거용인’이라는 말이 더 자연스럽다. 부동산 투자의 메카로도 용인 만한 곳이 없으니까. 용인은 1996년 군 단위에서 시로 승격할 때 만해도 ‘도농복합시’라고 했다. 26년이 지난 현재는 ‘특례시’라는 다소 무거운 이름이 덧붙여졌다. 하지만 특례시보다는 ‘도농복합시’가 더 어울릴 정도로 도시면적과 인구비율로만 따져본다면 도시양극화가 극명해 보인다. 처인구는 면적으로 볼 때 농촌 비중이 크다. 그만큼 기회의 땅이기도 하지만 방치된 곳이기도 하다. 안타깝지만 아직도 도시기반시설이 미비하거나 엉망인 곳이 허
새누리당 IT분야 인재로 영입 정치 첫발 세계적인 반도체 시티 조성 적임자 판단 대기업 경력 25년·정치경력 10년 쌓아 시민이 원하는 ‘지역발전’ 준비된 후보 [용인신문] Q. 정치는 언제부터 시작했나? 주요경력은? = 19대 공천을 위한 새누리당 인재영입위원회에서 IT분야 인재로 영입되면서 정치를 시작했다. 2012년 19대 대구 북구갑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미래창조과학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새누리당 대변인, 바른미래당 최고위원 등을 역임했고, 현재는 국민의힘 평당원이다. 첫 직장은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었다. 1986년부터 KT에 근무하면서 전 국민이 많이 사용하는 1588, 080, 콜렉트콜 등 다양한 통신서비스를 개발, 사업화했다. 그 성과로 두 번째 여성 임원이 되었고 총 24년을 근무했다. 주요 경력은 ‘19대 국회의원과 KT 상무’라고 할 수 있다. Q. 대구광역시 출신이다. 2012년과 2016년 총선에서 대구 북갑에서 출마했다. 용인을 선택한 이유는? = 용인에는 2011년 이사 왔다. 19대 공천 과정에서 IT분야 인재영입 케이스로 추천되었다. 당연히 비례대표를 받을 줄 알았지만 대구에서 초, 중, 고, 대학까지
20년 언론인 생활 접고 1998년 정치 입문 문재인 정권 실망 민주당 탈당 국힘 입당 정치력·경륜·정직·국제감각 등 최대 강점 용인의 잠재된 힘 이끌어내 성장가도 확신 [용인신문] Q. 정치는 언제부터 시작했나? 주요경력과 근황은? = 1998년 10월, 20년 가까운 언론계를 떠나 김대중 총재의 새정치국민회의 부대변인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시사저널 워싱턴특파원을 마치고 돌아와 정치부장을 맡고 있을 때인데, 여당 부대변인으로 스카웃 된 것이다. 제17대, 18대 총선에 출마했고, 대한건설협회 상임감사, 한국감사협회 회장, 한국외대 외래교수, 한국청소년운동연합 경기도지부장, 용인시 부시장을 역임했다. Q. 용인시 첫 제2부시장을 지냈지만, 현 민선 8기 출범 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퇴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해 달라. (현 백군기 시장과 관계는?) = 용인시 제2부시장의 직위는 정확히 말하면 정무직이 아니라 개방형 임용직 공무원이다. 법적으로 임기가 보장되어 있다. 함께 일한 시장을 따라 나가야 한다? 그 생각 자체가 잘못 된 거다. 누가 시켰는지 어쩐지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이 제 사무실 앞에서 ‘부시장 물러가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번갈아 시위를 했다.
[용인신문] 산티에고에 이어 제주의 길 이야기까지 김젬마 시인이 두 번째 시집 『와랑와랑』(천년의시)을 펴냈다. 산티에고 기행기인 산문집 『프렌즈 온더 로드』를 펴낸 바 있는 김 시인이 이번엔 제주의 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시집 『와랑와랑』에는 시인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의 흔적이 남긴 바람의 기도와 편지로 가득하다. 시인은 길에서 만난 초록 그늘에 모여 이사 가는 개미들의 발자국에서 지구를 떠받치는 개미의 힘을 발견하고, 그것을 한 장의 사진으로 남긴다. 그리하여 세상의 무수한 길을 걸으며 사진가의 눈으로 모든 것이 조락해 가는 11월에서 역설적으로 “모두 다 사라진 것이 아닌 달”(「달랑 남은 나뭇잎」)을 발견해 낸다. 이번 시집의 중반부 이후에 배치된 제주 시편들에서 시인은 탁월한 음성적 가락으로 길에 스민 삶의 애환과 정겨움을 발랄한 리듬에 실어 우리에게 선사한다. 우리는 여기서 탁월한 음유시인이란 길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람 많은 제주의 올레길과 그 속에 담긴 삶의 내력을 청각적 결합으로 표현한 “와랑와랑”도 그 한 예라 여겨진다. 문학평론가 오민석은 해설에서 “김젬마는 디스토피아의 시궁창에서 유토피아를 꿈꾸는 시인”이라며 “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