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나는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왜 사진을 찍느냐고 물어보면 딱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그냥 사진 찍는 게 좋아서라고 말한다. 사진은 우리의 삶과 자연의 외침을 담는 그릇이다. 빛바랜 사진첩에서 만난 사진 한 장은 지난날의 기록을 깨워 추억의 바다를 항해하게 한다. 필자가 헬기를 타고 하늘에서 바라본 용인은 참으로 아름답다고 느낀다. 석성산, 조비산 등과 경안천, 청미천 등의 하천이 조화를 이루고 빨간 여명 빛에 물드는 마성리 들판, 노랗게 익어가는 백암 들판은 농촌의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또한 그 속에서 도심지는 유기체로서 삶의 활기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올해 용인시는 관광도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新용인팔경’을 선정하여 용인의 아름다움에 공감할 수 있는 참신한 관광코스를 만들어가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하지만 기존의 석성산, 조비산 등은 선정된 지 16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키 작은 소나무, 상수리나무 등은 키다리 성인 목이 되어 사람들의 시야를 가리게 되었고, 가실리 저수지 주변의 수목도 크게 자라 본래 풍광을 잃어버리고 있다. 한편으로 용인의 급격한 도시화는 새로운 풍경을 창출하기도 한다. 수지구 쪽은 아파트
[용인신문] 내 어릴 적 꿈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었지만 지금은 27년 째 어린이집을 운영 중이다. 현재는 국공립어린이집을 위탁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 나는 장애아통합반을 개설한 후 유아교육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처음엔 장애아동 6명을 일반 아이들과 함께 통합보육을 시작했다. 운영에 많은 어려움도 있었지만 벌써 8년이 지나가고 어느 새 나는 장애아통합 교육의 전도사가 되었다. 해마다 신입생 부모님들과 기존 부모님들이 모여 간담회를 하면서 학기를 시작한다. 다양한 사연으로 장애아가 되었다는 이야기와 그 어려움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서로의 모습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모습을 보면서 통합어린이집 운영에 더욱 정성을 다하게 된다. 미국의 어느 작은 마을은 장애아이가 태어나면 온 마을이 움직인다고 한다. 다행히 우리 용인시는 전국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장애아통합시설 운영을 지원하고 있다. 단언컨대 전국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 우리 용인시이기에, 모두 부러워 한다. 솔직히 교육자들조차 장애 영유아의 교육엔 관심이 없다. 갈수록 발달 지연이나 자폐 성향의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는데도…. 아울러 장애아동과 비장애 아이들이 함께 교육을 받으면 장애를 바라보는 아이
[용인신문] 오늘날 오랜 역사를 통해 축척된 문화적 전통은 콘텐츠 산업의 성패를 가늠하는 중요한 문화역량으로 인식되고 있다. 설화, 지명, 인물, 역사적 사건 등 지역 고유한 전통문화 속에 담긴 스토리에 상상력이 더해지고 사업 역량이 만나면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인 문화상품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보아 왔다. 반지의 제왕,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대장금, 아바타 등 성공한 콘텐츠들 모두가 문화유산 원형을 기초로 개발되어 세계인의 공감을 도출한 예라 할 수 있다. 우리 용인은 지금까지 문화 정체성에 대한 조형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원천 소재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어 왔다. 정작 중요한 콘텐츠는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용인 문화유산 원형을 발굴하여 이를 문화산업적 측면에서 콘텐츠로 개발한다면 용인시만의 특화된 콘텐츠 자원을 확보할 수 있고 이것은 다양한 부문에서 널리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콘텐츠 개발의 대상이라 할 수 있는 문화원형은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생각해 보자. 우선은 고대로부터 교통의 요지로 인식되던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형성된 자원들이 있다. 대표적인 관방유적으로 할미산성이 있는데
[용인신문] “동방에 정기모여 수려한 조국/ 그중에도 산수 좋은 용인 내 고향/ 무성한 봉이 봉이 아름다운 들/ 흐르는 시내조차 수정 같고나” 이 노랫가락은 젊은 시절 서울에서 객지 생활을 할 때 외롭고 힘들면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며 향수를 달래던 곡이다. 그 시절이 지금도 아련히 떠오를 때가 많다.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에 서울에서 용인으로 내려왔다. 그때만 해도 시골 인심의 푸근함을 느끼며 자리를 잡던 시절이다. 내 기억으로는 인구가 16여만 명 쯤이었다. 2년 정도 이런 저런 일로 당시 용인군청을 드나들다 보면 공무원들하고 거의 눈인사 정도는 나눌 수 있는 분위기였다. 그랬던 소도시가 1996년 인구27만 여명의 시로 승격되었다. 용인서부권역에서는 급격하게 난개발이 진행되면서 아름답던 용인시가 난개발이라는 오명을 듣기 시작했다. 개발은 계속되었고, 인구 100만이 넘는 수도권의 거대도시로 급부상했다. 30년 전의 용인은 먼 과거 이야기가 되었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그야말로 신도시 용인이 되었다. 이제 인구 107만의 공룡도시로, 조만간 특례시 승격까지 앞두고 있으니 격세지감이다. 외형적으로만 보면 분명 거대 도시로 발전했다. 지역
[용인신문] 내가 이곳 지곡동에 와서 가장 처음 본 것은 옹기종기 모여있는 정겨운 한옥과 그 지붕 위를 내리쬐는 따스한 햇살, 그리고 오솔길처럼 좁은 1차선 도로였다.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자락이 마을을 품에 꼭 안은 듯한 안락함과 평화로움은 내가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내 일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용인에서 태어나 초, 중, 고등학교를 다녔고 대학 졸업 후 줄 곳 용인에서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는 나는 온전한 용인 토박이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용인에 대한 나의 주인의식은 왠지 자꾸 깊어진다. 사람이든 나무든 한곳에 뿌리를 내리고 산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모두가 떠돌며 사는 유목의 시대에 큰 고목처럼 평생을 한 곳에 뿌리내리고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행운이며, 축복이다. 사과나무어린이집 숲 놀이터에 알록달록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걸 보니 어느새 가을이 성큼 다가온 듯하다. 어제는 아이들과 농장에서 직접 키운 고구마를 수확했다. 송글송글 코끝에 땀이 맺히고 넝쿨을 따라 고구마가 줄줄이 따라 나오는 즐거움에 아이들은 땅 파는 일은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이 캔 고구마 보다 실컷 흙 놀이를 하며
[용인신문] 흰 구름이 뒷산 밤 나뭇가지에 걸려 며칠째 떠나질 않는다. 머지않아 밤송이 벌어지는 소리, 도토리 상수리, 산열매 떨어지는 소리에 가을 산이 후두둑후두둑 소란해 지겠다. 과천 생활을 접고 용인에 든 지가 근20년이 되어가던가. 가뭄으로 속 타던 지난 여름 같았던 용인 살이의 시작이었다. 거센 장맛비 한 번에 지금, 풍만한 가을로 익어가고 있으니, 나 또한 빗물처럼 이곳에 스며들어 튼실하게 잘 살고 있다고 믿고 있다. 용인에서 나고 자라고, 다시 그 자리에서 새 세대를 이룬 원주민들의 끊을 수 없는 지연과 끈끈한 학연으로 얽히고 견고하게 뭉친 사람들. 시내에서 작은 구멍가게를 꾸려가고 있는 내가 처음 느낀 처인 사람들이다. 직장 내에서의 호칭도 형, 아우, 선 후배였다. 타지에서 온 나는 혹시라도 있을 지 모를 편애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절망한 이유다. 하지만 그 생각들은 처인 사람들에 대한 무례고, 기우였다. 낯설고 어섧던 내게, 주변은 친근하게 와주었고, 소상하고 친절했다. 오랫동안 이어진 따뜻한 배려에 용인 사람보다 더 깊이 용인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더 깊이 들어가 보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문학인의 단체인 용
[용인신문] 용인과의 첫 인연은 함박눈이 꽤나 내렸던 1985년 1월27일. 그날은 바로 내 인생의 반려자가 된 용인사람을 처음 만났던 날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34년을 용인에서 살았다. 용인은 이제 사랑하는 제2의 고향임에 틀림없다. 오히려 친정인 서울길이 헷갈릴 때가 있을 정도다. 마평동 신혼시절, 용인 5일장이면 장터를 오가며 용인살이를 익혔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차츰 이웃을 사귀며 새 인생을 시작했다. 정말 힘들었던 만학의 꿈을 이룬 곳도, 용인문협·용인문화원과의 인연으로 인간관계의 신뢰를 쌓아 온 곳도 용인이다. 돌아보니 인간관계라는 큰 재산을 축척하게 만들어준 곳도 용인이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무엇보다 용인사람이 되어 가장 기쁘고 보람된 것은 내가 전력을 바쳐온 일터 ‘반딧불이’이가 있다는 것 때문이다. 중앙공원이 자리한 노고봉을 매일 바라보며, 사계절 자연의 변화를 가까이 체험하는 나름의 축복도 누리고 있다. 시간이 허락할땐 용인의 산하를 드라이브코스 삼아 볼거리와 먹거리를 즐긴다. 곱든 고개를 넘어 사암저수지를 조망하며, 농촌테마파크를 들러, 원삼막걸리 양조장과 백암 순댓국까지…이런 용인은 나에게 아름다움과 맛이 기다려지는 시간이다.
[용인신문] 추석이 지났다. 어스름이 일찍 내려앉기 시작했다. 탄천을 걷기 위해 집을 나섰다. 어느덧 횟수로 3년. 늦은 나이에 단국대학교 대학원을 다니기 위해 용인으로 이사를 왔다. 7년 전.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을 공부하던 중이었다.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 때문에 5년이라는 시간을 병과 싸워야 했다. 다행히 약으로 치료되었지만, 약의 부작용은 사람(여자)으로서 견디기 힘든 심적 고통을 안겨주었다. 얼굴은 호빵맨이 되었고, 머리카락은 다 끊어졌다. 건강과 함께 나의 40대가 사라졌다. 나의 배움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 시간이었다. 가을 단풍이 예쁘게 내리는 날. 딸 아이가 내 손을 잡았다. “탄천 걸어 볼까, 엄마.” 밖의 공기는 시원했다. 천천히 아이의 손을 잡고 걸었다. 탄천 변으로 내려가는 길의 벚나무에서 단풍 비가 내리고 있었다. 붉은 노을과 함께하는 용인의 탄천은 장관을 연출했다.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피어 있었고, 매미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하천에는 물고기들이 가득했고 유유히 걷고 있는 왜가리의 모습은 여유로웠다. 산들바람에 갈대와 억새풀이 하늘거리고, 창포, 애기부들, 줄 등 수생식물이 즐비했다. 탄천 변에는 이름 모를
[용인신문] 서울에서 분당으로, 분당에서 용인 수지로 이사 온지 벌써 20여년이 다 되어간다. 타지에 살면서도 친구들과 또는 혼자 드라이브하면서 봄이면 호암미술관 벚꽃길을 찾았고 가을이면 에버랜드 단풍길을 찾았었다. 가까운 곳에 이토록 아름다운 갈 곳이 많다는 것에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돌아오는 길에는 어김없이 용인의 다음을 기약하곤 했던 것이다. 산과 숲이 많은 아름다운 용인의 자연환경은 팍팍한 도시에 살던 사람들에게 영원히 살고 싶은 곳으로서 끌리는 매력이 대단하다. 이런 자연 환경은 나의 삶도 크게 변화 시켜놓았다. 들어 올 때는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들어왔었지만, 가부장적인 가정의 아내로 살아오는 동안 잃어버렸던 자아와 열정을 돌려주고 수 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 나를 깨우쳐 온전하고 큰 의미인 문학과 시를 찾아주고 나의 감성을 따뜻하게 품어 준 곳이다. 그 중심에는 잠깐 바람만 쏘이고 와도 좋을 곳, 발길 닿는 곳곳의 명소인 에버랜드 가는 길과 갖가지 테마파크와 휴양림,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자작나무 찻집 가는 길 등의 서정적인 풍광과 도시하고 가까우면서도 옛 고향에 돌아와 있는 듯, 인정과 배려와 따뜻함이 몸에 밴 따뜻한 용인사람들이 있다. 용인수지에
[용인신문] 대전에서 살다가 용인에 올라와 정착한 지 23년이 넘어갑니다. 제 나이가 마흔여섯이니 내 인생의 절반을 용인에서 산 것입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용인에 보금자리를 튼 것은 대학진학 때문이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도 고향이나 여타의 지역으로 이주하지 않은 까닭은 어디까지나 저의 선택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는 삶의 중요한 순간을 용인과 함께했습니다. 김천과 보은에서 태어난 청춘이 용인에서 만나 결혼을 한 것이나 직장을 구하고 세 딸아이를 낳은 것 용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또한, <용인문학회>의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면서 시인, 문학평론가로서 활동한 것, <용인교육시민포럼>의 일원으로서 교육과 관련된 활동을 하게 된 것 모두 용인이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용인은 저에게 지명 중의 하나가 아닌 오늘의 나라는 현존재가 만들어진 출발점입니다. 오늘의 저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고, 활동하고 있는데 생각해보면 그 이름 모두가 용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저는 용인과 연결되지 않은 일들에 대해선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용인이 저에게 선물했던 다수의 결과물에 대한 보답이라고
[용인신문] 용인으로 이사한지는 벌써 6년이 되어간다. 그동안 인접 지역에서 살다가 길 건너편으로 이사하여 행정구역이 변경되었다. 그렇기에 새로운 지역으로 간다는 생소한 설렘은 거의 없었지만 용인시의 곳곳을 잘 안다거나 특별히 자주 다니는 곳도 없었다. 전에 살던 건너편 도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자연을 품은 도시라 차로 이동하다 보면 녹지가 많이 보인다. 용인은 경기도의 남부 중앙이면서 면적도 넓은데다 예로부터 수렵과 농경이 동시에 가능한 하천을 낀 산간지역이 발달하였다. 그런 이유로 많은 선사 유물들이 발굴되어지는 탓에 우리 동네도 개발이 몇 해 늦춰지기도 했다. 이번 여름에는 멀리 떠나는 대신 용인자연휴양림으로 향했다. 그곳은 해발 562m의 정광산 남쪽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울창한 숲 속에 숙박시설, 산책로, 어린이 놀이터 등이 있어 가족들이나 모임, 단체에서도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차로 달리는 내내 8월의 여름 하늘은 누구라도 기운을 돋게 하는 환한 얼굴로 웃고 있는 듯했다. 휴양림에 가까워질 무렵 하늘에서 패러글라이딩 하는 모습이 보였다. 휴양림 뒤에 솟은 정광산 정상에 활공장이 있어서 패러글라이딩의 메카이기도 한 곳이었다. 그래서 휴양림 입구
[용인신문] 내가 대학에서 퇴임한 것이 작년 2월 말이었다. 아침 9시쯤 일어나 자료와 연구서를 읽고 글을 쓴다. 어둠이 아파트 단지에 내리면 밖으로 나와 1시간 10분 가량 걷기운동을 한다. 집으로 돌아와 씻고 저녁 9시부터 새벽 2∼3시까지 글을 쓰고 잠자리에 든다. 단순화 한 생활 속에서 동백택지개발지구를 벗어나는 날은 내가 서울에 있는 출판사에 한 달에 한 번 정도 나가 출판 기획을 봐주는 날과 한 달에 두 번 정도 이동읍에 있는 텃밭에 나가 농작물을 가꾸는 날이다. 내가 이십여 년 전 용인시로 이사와 처음에 이삿짐을 푼 곳은 이동읍의 농촌 마을에 있는 아파트였다. 그곳에 살 때 채소 농사를 주로 짓는 농민이 주선해준 텃밭에서 농작물을 가꾸는 일을 내가 동백택지개발지구로 이사를 온 후에도 이어가고 있다. 지난 해 8월 하순 용인버스터미널 옆에 있는 종묘사에서 배추 모종을 100포기 사서 미리 축분과 복합비료를 뿌려 놓은 밭에 심었다. 배추 모종을 심은 뒤 가뭄이 계속되었다. 축 늘어진 호박잎들이 차창으로 쓰러졌다. 버스에서 내려 슈퍼에서 생수를 3병 사들고 텃밭으로 갔다. 배추들이 모두 시들시들하였다. “오래간만이요.” 지나가던 농민이 말했다. “가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