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현서 태어난 조선시대 대학자
백과사전 문집 ‘문통’ 역작 저술
시장 바뀌며 ‘가치 재조명’ 외면
[용인신문] 태교신기를 쓴 사주당 이씨가 낳은 천재 아들 유희(柳僖1773-1837). 용인시는 사주당 이씨가 쓴 역작 ‘태교신기’를 스스로 걷어찼다는 비판을 받는 가운데, 그의 아들 유희 선생 역시 중요한 역사 인물임에도 용인시에서 외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관련기사 본보 1269호 1면
실제 용인시에서는 묘역 외엔 별다른 연고가 없는 정몽주를 비롯 여타 인물들에 대해서도 해마다 크고 작은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용인 출생으로 대학자인 유희 선생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반면, 학계에서는 조선 후기 유학자이자 실학자이며 음운학자인 유희가 용인 출신이라는 점과 어머니 사주당 이씨와 함께 용인에 잠들어 있다는 점을 소중한 문화유산 콘텐츠로 꼽고 있다. 그간 용인시에서 사주당 이씨의 태교신기를 콘텐츠로 한 ‘태교도시’선포 사업은 앞으로 학계에서 새롭게 조명 될 유희 선생을 염두에 둔 전초전이었다. 그럼에도 용인시는 단체장이 바뀌면서 사업의 연계성을 상실, 타 지자체에 주도권을 빼앗기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용인시 처인구 모현에서 태어나 모현에 잠들어 있는 용인 토박이 대학자 유희. 현재는 언문지를 쓴 인물 정도로만 대중에게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유희가 남겨놓은 백과사전적 문집 ‘문통(文通)’은 실로 내용이 방대하고 심오한 백과사전적 저술이다.
지난 2000년에 진주 유씨 문중이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문통을 기증했을 때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정약용, 이익에 버금가는 대학자라며 유희에 주목했다. 문통이 발굴돼 유희의 학문 세계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었다. 그러나 유희가 남긴 문통이 워낙 분야가 방대하고 내용이 어렵기 때문에 현대 학자들의 연구 접근이 용이 하지 못한 이유로 여태 문통의 전모가 드러나지 못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현재 연구가 진행되고 있어 결과를 기대케 한다.
만약 진행 중인 연구 결과가 나오게 되면 학계가 놀랄 것이라는 이야기가 간간이 들려오고 있다. 어쩌면 정약용을 뛰어넘는 대학자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는 게 학계의 조심스런 전망이기도 하다. 진주유씨 문중이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한 문통은 44책 69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으로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에 버금가는 규모다.
문통은 경학, 문학, 어학, 기술의학, 역사 등 다방면에 걸쳐있다.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 중국의 경전에 대한 주석 등을 달아 놓은 경학류가 27권으로 가장 많고, 문학류가 17권이다. 천문지리서인 ‘관상지’와 공예기술서인 ‘고공기’, 의약류, 단학류 등 자연과학서적도 다수 포함돼 있다.
생전에 유희와 교유했던 강화학파의 학자 신작(1760~1828)은 유희의 어머니 이사주당이 지은 ‘태교신기’의 서문을 쓰면서 유희에 대해 말하기를 “뛰어나게 슬기로운 식견에 그 학문이 춘추에 특히 깊고 음양, 음악, 천문, 의학, 수리 서적에 관해 그 근원까지 이르지 않음이 없고, 그 지류까지 다하지 않음이 없다”고 한 바 있다.
유희가 이처럼 대학자이면서도 우리에게 아주 낯선 이유는 그가 시류에 영합하지 말라는 어머니 말씀대로 벼슬길에 오르지 않아 유명세를 타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희는 평생을 가난하게 농사를 짓는 한편 유의(儒醫)로 살면서 종이조차 없어 낡은 종이를 잇고 기어가며 저술에만 평생 매달렸다.
유희는 살아생전이나 지금이나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당시에도 그는 천하기재(天下奇才)로 평가됐으며 천재성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일화가 많다. 실제로 유희는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발휘했다. 5살에 ‘성리대전’을 보고 기뻐해 밤낮으로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정철조의 품에서 ‘역학계몽’을 논하고, 9살에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소문나 있던 ‘서전’의 기삼백 주석을 깨우쳤다는 이야기는 대표적 사례다. 또 9살 때부터 부친 유한규에게 수학을 배웠고 10여세 때부터 수학 복서 천문 지리의 오묘함을 깨우쳤다.
뿐만 아니라 당시 ‘고공기(考工記)’는 읽기 어려운 책으로 유명했다. 까다롭고 어려워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서유본이 ‘고공기도(考工記圖)’를 어떤 사람에게 빌려본 적이 있는데 ‘도수지학(度數之學)’은 정미하고 주밀함이 매우 어려워서 열흘 보름을 읽으면서 뜻을 거듭 음미하고 따져보아도 그 깊은 곳을 탐구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유희는 객지 생활의 바쁜 와중에 5일 밤만에 번개처럼 읽고 설명서까지 지었다. 유희가 자신의 ‘고공기도보주보설’에서 말하기를 “나는 객지에 머물고 있는 중이었는데 돌아가야 할 기일이 촉박해 5일 밤 동안 등불 밑에서 바쁘게 열람하면서 함부로 갈기어 어지럽게 초고를 썼다. 비록 낡은 빗자루 같은 원고지만 거의 백수(白首)의 노고를 들였으니 보는 사람들이 항아리 덮개로 쓰지 않으면 다행이겠다”고 썼다.
유희는 “평생 배운 것은 용을 잡는 기술인데, 끝내 쓰임새가 옷섶의 이를 죽이는데 있구나”라며 자조 섞인 탄식을 했을 정도로 천재였지만 벼슬에 오르지 않고 포의(농민)로 평생을 살았을 뿐이다.
유희의 저술을 전체적으로 검토했던 위당 정인보는 뛰어난 재주를 갖춘 깊은 학식의 소유자 (高才邃學)로 평가했다. 위당 정인보 선생은 1931년에 동아일보에 ‘조선고서해제’를 18회 연재하면서 8번째에 유희의 문통을 소개했다. ‘문통’ 가운데 과학사와 음악사 자료의 일부 전사본이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돼 그간 관련 연구자들이 주목해왔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도 시문집 등을 정리 영인해 유희의 일생과 정신세계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했다.
한편, ‘이사주당과 유희’는 조선시대 율곡이이라는 대학자를 키워낸 ‘신사임당과 이이’와는 또 다른 실학의 상징적인 모자(母子)로 크게 부각 될 수 있다는 게 학계의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