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현 작가의 삶의 낙서
고양이를 부탁해...
따뜻한 관심이 필요해..
몇 년 전 작은 새끼고양이가 우리 집에 왔다. 편의점 작은 상자 속에 버려진 새끼 고양이가 불쌍하다며 딸아이가 대책없이 데려온 것이다. 그 고양이는 나에게는 정말 싫은 불청객이었다. 검은색 고양이는 아니었지만 소설속의 고양이도 그렇고 영화 속의 고양이도 그렇고 고양이는 내게는 기분 좋은 동물이 아니었다. 한바탕 야단을 맞은 딸아이는 훌쩍거리기 시작했고 나는 책임을 질 수 없으니 빨리 원래 그 자리로 데려다 놓으라고 했다. 딸은 거기 데려다 놓으면 새끼 고양이라서 위험하다고 떼를 썼다. 나는 이 집에서 고양이를 키울 수 없다며 으름장을 놓고 외출을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머리속이 복잡했다. 집에 들어온 고양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고민하다가 하루를 생각해보기로 했다. 딸에게 전화를 했다. 딸은 울먹거리며 알았다고 했다. 집에 와서 얘기하니 딸은 동물병원에 가서 안락사까지 물어봤다고 했다. 그 소리를 들으니 그건 아니다 싶어서 결국 그 고양이는 우리 집의 가족이 되었다.
그런데 고양이가 생긴 후 우리 집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별로 대화가 없던 딸과 나 사이에 고양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남편도 그랬다. 사춘기가 된 딸과 대화할 시간도 소재도 없었는데 고양이가 매개체가 된 것이다. 희한하게도 그렇게 그 고양이는 불청객에서 가장 소중한 가족이 되었다.
사건이 생긴 것은 내가 친정에서 돌아 온 그날이었다. 문을 열면 문 앞에서 ‘야옹’거리던 그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가끔 억지로 딸이 산책을 시킨 적이 있어서 그러려니 하고 나는 밀린 청소를 시작했다. 1시간이 지난 후 나는 딸에게 문자를 보냈다. 고양이가 없어졌다고, 하지만 딸이 고양이를 데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걱정하는 척하며 장난스럽게 보냈다. 하지만 딸은 놀라서 전화를 했고 그 전화와 함께 우리 집의 일상은 깨어지기 시작했다. 남편이 아침에 출근하면서 문을 연 사이에 고양이가 아파트 비상계단으로 도망가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아침 7시에 사라진 고양이를 오후 5시에 알게 된 것이다. 그것도 내가 돌아온 후에 말이다. 아파트를 샅샅이 찾아다니며 절망감에 힘이 빠졌다. 나도 예전에는 반려동물을 잃어버렸다고 전단지를 붙인 사람들을 이해 못했다. 사람을 잃어버린 것도 아닌데 하면서 말이다. 한편으로는 비싼 강아지였나 보다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고양이를 키워보니 기른 정이 만만치 않았다. 비싼 반려 동물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우리 집 고양이는 길고양이였다. 하지만 키우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그냥 자식을 키우는 거나 다름없었다. 한참을 찾다가 집에 들어와 울고 있는 내게 딸이 소리치며 들어왔다. 고양이를 찾았다고 말이다. 집 고양이라서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다보니 옆 동의 어느 집으로 들어갔는데 마침 강아지를 키우던 집이라 고양이를 보관했다고 한다. 하지만 강아지가 너무 짖어서 관리 사무소에 부탁을 했고 주인이 틀림없이 찾아올 거라며 신신당부를 했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관리실 직원이 웃으며 데려갔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얼마나 다행이냐며……. 그 시간이 오후 8시라 모두 퇴근했고,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새며 아침 9시 출근 시간을 기다렸다. 이동장을 들고 떨리는 마음으로 관리 사무소를 갔더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나를 보고 당황하는 것이다. 뭔가 불길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직원은 고양이를 그 집에서 억지로 끌고 나왔을 뿐 데려오지 않고 그냥 아파트 계단에 놔두고 온 것이다. 그냥 방치한 것이다. 순간 절망감에 또다시 눈물이 흘렀고 직원은 자신을 깨물어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계단에 버리고 올 거면 그 아주머니에게 왜 보관한다고 했냐며 저는 되물었고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내 눈을 쳐다보며 민원을 처리했을 뿐이라며 자신의 행동만을 변명했다. 나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식 같은 반려동물을 그렇게 놔뒀다는 것이 가슴이 아팠다. 나중에 CCTV를 봤더니 고양이가 사람들에게 쫓겨 나가는 영상이 있었다. 그 영상이 떠올라 너무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고양이를 잘 아는 분이 고양이는 멀리 가지 않는다면 조금 더 찾아보라고 했다. 그래서 딸과 나는 새벽 1시에 집 주변을 살폈다. 기적이 일어났다. 고양이는 우리가 사는 아파트 동 앞을 배회하고 있었고 내가 부르는 소리에 조금씩 다가왔다. 익숙한 냄새에 의심 없이 다가 온 고양이를 꼭 안고 나는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다.
일상이 깨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지 나는 깨달았다. 일상이 지루하다고 투덜대던 내게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다. 왜 사람들이 반려 동물을 애타게 찾는지 그 심정도 알았다.
용인에서 서울로 가는 경부 고속도로에는 오래된 현수막이 걸려있다. ‘송혜희를 찾습니다’ 라는 현수막을 한번쯤은 봤을 것이다. 잃어버린 지 20년이 다 되가는데 포기하지 않는 그 심정을 솔직히 이해하기 보다는 안타까워만 했다. 하지만 가족 같은 반려 동물을 잃어버려도 피가 마르던 그 심정을 경험하면서 이제 그 부모의 심정을 진심으로 알게 되었다. 전단지를 받아주고 걱정해주고 나와함께 관리소 직원을 원망해주던 낯선 이의 관심이 너무도 고마웠다. 고양이를 끝까지 보관하지 못해 미안해하던 그 아주머니의 전화도 고마웠다. 고양이를 찾은 후 누군가의 아픔을 공감해주는 것이 얼마나 따뜻한 위로인지 새삼 깨달았다.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그 관리소 직원의 모습을 보면서 수많은 아이들이 희생되었는데도 누구하나 책임지지 않던 몇 년 전이 떠올랐다. 그 가족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달고 있던 노란 리본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작은 리본에도 따뜻한 위로의 온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 리본을 끝까지 달고 있는 누군가의 관심이 자녀를 잃어버린 가족들에게는 정말 따뜻할 것이다.
‘실종 된 송혜희를 좀 찾아 주세요’ 라는 기사를 다시 찾아보았다. 딸을 잃어버린 어머니는 결국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아직도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다고 한다. 전단지 속에 절실한 문구가 눈에 띄었다.
‘저희 딸을 찾아주신다면 심장을 팔아서라도 그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
심장이 뛰고 있는 한 그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차가운 겨울, 따뜻한 관심이 더욱 필요한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