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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현의 삶의 낙서

 

 

린 시절, 새벽이면 골목마다 물건을 팔러 다니는 아주머니들이 있었습니다. 희미하게 기억해보면 소금이나 재첩국 같은 것이었습니다. 새벽이면 늘 들려오는 그 소리 바로 뒤로 아주머니들이 우리 집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마땅한 국거리가 없을 때 엄마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아주머니를 불러 재첩국을 샀던 것 같습니다. 소금도 꼭 새벽에 소금을 팔러 다니는 아주머니를 통해서 샀습니다. 그리고 엄마는 그 아주머니들을 불러서 꼭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대접했습니다. 한사코 거절하는 아주머니들에게 새벽에 밥이라도 먹었겠냐며 간단한 반찬과 따뜻한 밥을 차려주셨습니다. 아주머니들은 미안해하며 소금 값이며 재첩국 값을 받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면서 있는 밥에 반찬 주는 건데 부담 갖지 말라고 하시며 아주머니들의 부담을 덜어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물건을 사는 엄마는 그 아주머니들에게는 갑()이었을 텐데 을()이었던 아주머니들은 엄마의 갑()질 때문에 따뜻한 하루를 보내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부터인가 갑()이라는 의미가 조금 부정적인 것으로 변질되고 있는 듯합니다. 연일 뉴스에서는 부당한 갑질에 대한 사건 사고들이 들려옵니다. 참 이상합니다. 왜 갑이라는 단어에 질이라는 글자가 붙어서 갑()의 의미가 갑질이란 단어로 폄하되기 시작한 것일까요..

()이라는 위치가 쉽게 돈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어서일까요? 물건을 사는 사람은 돈으로 물건 값을 지불하면서 덤(?)으로 갑()이라는 위치가 된다고 생각하나봅니다.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들은 그 서비스를 돈으로 샀다고 생각하며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에게 설마 함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라는 이름으로 을()의 입장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사람들은 갑()이 아니라 진상 손님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사실 그 사람의 품격은 그 사람이 을()의 위치에 있을 때는 알 수가 없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을()의 위치에 있을 때는 자신의 갑()에게는 예의바르고 친절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은 그 사람이 갑()의 위치에서 을()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민낯을 드러냅니다. 회사 내에서 자신의 상사에게 잘하는 것은 당연하고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회사의 경비아저씨에게도 친절한 사람인가를 지켜봐야 합니다. 아파트 입주민들이 아파트 경비들에게 왜 갑()이 되어야하는지 이해가 잘 안됩니다. 대부분 아파트의 경비아저씨들은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들인데 왜 젊은 입주민들이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일까요?

 

 

깐 이제부터 주변을 행복하게 하는 제가 잘 아는 사람의 갑()질 이야기를 해볼까합니다

그녀는 아파트에 시장이 서는 날이면 군것질거리를 잘 삽니다. 한번은 그녀의 집에 놀러갔다가 두 사람이 먹을 빵을 두 봉지나 사기에 너무 많다고 그녀에게 한봉지만 사자고 말렸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씩 웃더니 경비실을 경유하며 봉지 하나를 놓고 나왔습니다. 원래 미소가 아름다웠던 그녀는 여전한 그 미소로 경비아저씨와 인사를 나눴습니다. 어찌보면 별 것 아닌 빵 한봉지이지만 경비아저씨의 웃음을 보니 그 아저씨의 하루가 그녀 때문에 조금은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그녀는 정수기 기사가 필터 교환을 위해 방문하는 날이면 꼭 고급 찻잔에 받침대를 갖추고 정수기 기사에게 커피를 대접합니다. 그녀는 많은 고객을 상대하며 스트레스가 받을 일이 많은 정수기 기사에게 유일하게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고객일 것입니다. 정수기 기사의 스케줄에 맞게 필터 교환날짜를 맞춰주고 가끔은 식사도 못 챙기실 것 같다면서 간식도 건넵니다. 별스럽다는 내 핀잔에 그녀는 일 년에 고작 네 번 방문하는 아저씨라면서 또 피식 웃습니다. 혹자는 저처럼 그런 그녀를 오지랖이 넓다고 말하거나 피곤하게 산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 피곤해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미소는 더 예뻐지고 여유까지 느껴집니다. 한 번은 우리 집에 놀러왔다가 남은 재료에 샌드위치를 하나 더 만들어달라고 하기에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도 마침 볼 일이 있어서 같이 마을버스를 타서 자리에 앉았는데 그녀가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러더니 슬며시 운전석으로 가서 샌드위치를 내밀었습니다. 기사 아저씨는 힐끗 보더니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평소에 마을버스 기사님들 보니까 식사할 시간이 없다고 하더라며 샌드위치를 놓고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못 말리겠다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녀가 갑()이 될 때 그녀의 을()들은 참 행복할 것 같습니다. 고객이 왕인 정수기 기사에게도, 승객에게 친절해야하는 마을버스 기사에게도 그녀는 참 반가운 갑()일 것입니다. 그녀가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을 때 그녀 주변에 을()들은 한결같이 나에게 그녀의 안부를 물으며 그녀의 건강을 걱정해주었습니다. 나에게 그런 분은 절대 아프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행복한 갑()(?)은 희한하게 그녀의 삶을 갑절로 행복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그녀는 바로 새벽 장사를 하던 아주머니들을 집으로 초대해 밥을 대접하던 저의 엄마입니다

그렇게 그녀의 행복한 갑()질은 그녀 주변의 을()들을 향해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