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핀 밤나무 홍재석 그대 귀가 있던 자리에 낙엽지는 걸 본다 그 낙엽 시들 지 않아 칼날같은 한철 끝나지 않는다 꽃 같은 그대의 귀 를 베고 간 칼날, 그 칼날 몸속에 흐르므로 그대는 지금 낙엽으로 붉게 젖은 자리를 지난다 식지 않은 낙엽을 밟 으며 그대는 그대를 꽃 피게 한 사랑을 미워한다 그대는 꽃이 났던 자리가 아프고 그 자리에 다시는 꽃눈 맺지 않 을 거라 생각한다 허나 그대는 스스로 비명을 듣지 못하 므로 아프지 않기로 한다 몸속에 흐르는 칼날이 소용돌이 치는 날, 피지 않는 꽃과 시들지 않는 낙엽 사이에서 그대 는 봄날처럼 미쳐버리고, 봄날은 찾아오지 않고, 그대의 절망 새싹처럼 깨어있다 뭇엇도 잠들지 않는 폐허, 같은 그대의 화원 그대는 거기서 푸른 새싹과 뜨거운 낙엽으로 나를 그린다 지금 나는 그대의 척추 같은 나무가 된다 그 러니 그대는 그대 사랑했던 자리마다 나를 세워두도록 한 다 그리고 시월의 밤나무가 그러하듯이 그대가 흘린 뜨거 운 낙엽 책임지지 않도록 한다 이듬해 봄이 다 오도록 굳 지 않고 맥박치는 낙엽이 있거든 나 또한 잠들지 않고 미 쳐버리면 된다 미쳐서 나의 가지는 스스로를 벨 칼날이 되고 그 베인 끝자락마다 아프다는 소리
나는 행복한 사람 장진수 노래자랑에 참가해서 나는 행복한 사람을 불렀어요. 비에 젖은 무대엔 경사로가 없었죠. 무릎으로 경사로를 만들었더니 바지가 다 젖었어요. 관객들이 박수로 격려해 주었어요. 나는 행복해지려 열창했어요. 젖은 청바지는 빨아서 말렸지만 젖은 무릎은 생채기로 남았어요. 장진수 장애인 평생교육시설 '가온누리평생학교' 학습자 뇌병변, 지적장애
철구소 다슬기 권지영 짙은 무더위에 익숙해졌지만 늦은 때란 없는지 배내골 철구소로 피서를 갔어. 너럭바위에 짐을 놓고 앉으려는데 빗방울이 소리 없이 떨어지기 시작했어. 물 위로 둥근 무늬가 번질 때마다 흰 나비가 팔랑거려. 빗방울이 그리는 무늬마다 빛이 퍼졌어. 수많은 둥근 반짝임이 물 위에서 연주를 하듯 퍼져 나갔어. 계곡 아래로 푸른 수초들을 건드리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며 밀려갔어. 바위 아래 물속에서 다슬기들이 올려다보고 있었지. 권지영 시인 2015 《리토피아》 신인상, 저서 『아름다워서 슬픈 말들』 『누군가 두고 간 슬픔』 『푸른 잎 그늘』 『천개의 생각 만개의 마음;그리고 당신』등.
엄지의 유영 김선수 거리에서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무언가를 귀에 꽂고 있어요 달팽이가 여린 몸을 동그랗게 말고 제 집으로 들어가 다리를 뻗듯 엄지를 닮은 이어폰을 귓바퀴 속으로 밀어 넣고 듣고 싶은 소리를 고르네요 노이즈캔슬링은 참 편리해요 소란스러운 세상을 피해 나만의 바다가 생기거든요 바람이 내는 소리 풀잎에서 이슬이 떨어지는 소리 다정한 음성 절박한 비명 따위는 들리지 않아요 아무래도 뇌가 점점 작아지는 중입니다 이어서 심장도 쪼그라들고 세상도 엄지만큼 작아지는 중 같습니다 살아가는 일이 크게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밤이면 케이스에 들어가 금속의 점들과 접선을 하고 딸깍, 뚜껑을 닫고 나서야 안도의 잠을 충전합니다 아침이면 배꼽에 탯줄을 연결하듯 어머니 뱃속을 유영하러 다시 길을 나서겠지요 내일은 귀를 기울여 살면서 놓친 소리를 찾아내면 좋겠습니다 김선수 약력 <문파문학>시 등단(2021) 용인문인협회 회원. 문파문학회 회원. 아주문학 동인. 한국여행작가협회 회원 브런치 작가
노란 외로움을 끓여 먹는다 공다원 한밤 주방 서랍을 뒤진다. 요행이 하나 남은 라면이 반갑다. 그것을 끓여 냄비째 서서 후루룩 먹는다. 긴 면발을 타고 한참 먼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엄마가 쥐어준 17원 단걸음에 색도 고운 라면 한 봉지를 사 온다. 일곱 식구 먹을 라면을 못 사고 언니, 오빠 학교 간 틈타 엄마는 노란 냄비를 화로에 올려 보글보글 노란 라면 을 끓여주셨다. 약력 단국대학교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현재 용인중앙IL, 가온누리평생학교 대표 대표저서 2014년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 <기울지 않는 조각배>
흔들리다 스며들다 최정용 스며든 게다, 우리는 돌이키면, 몇 번의 조우(遭遇)도 조심스레 피하며 서로의 마음 다듬었던 게다 서둘러 상처 되지 않도록, 상처주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던 게다 옹이며 거친 결, 녹이고 다듬어 눈 쌓인 새벽 길 순결한 첫 걸음, 그 마음 보듬어 흔들며 흔들리며 다가선 게다 하여, 운명의 순간 봇물로 하나 된 게다 푸른 하늘이 붉은 대지 만나 사랑의 사막에 꽃이 피고 마침내 푸른, 사랑의 정원 빛 고운 떨림으로 우주에 번져 저물지 않는 이름으로 지지 않는 그리움으로 처음 온 곳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스며드는 게다, 우리는 -. 강원도 속초시 청학동 출생 -. 2014년 서정시학 신인상 -. 경기신문 지역사회부 용인담당 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