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룡의 역사 타파(70) 염치없는 양아치와 야합하는 정치인들깜냥이 안된다는 의미로 통했다. 815 광복 직후에 거지들의 조직이 분업화되었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얻어 오는 것을 상납 받아 생활하는 왕초, 왕초의 시종 역할을 잘해서 얻어 먹는 자들이 똘마니였다. 날치기는 막무가내 빼앗아 오는 자, 꽃제비는 몰래 훔쳐 오는 자(지금은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북한의 어린 아이들을 지칭하는 은어)로 조선 후기에 소매치기에서 생성된 용어였다. 장타령은 각설이 타령의 평범한 예능을 보여주고 먹을 것을 요구하는 자들이었고, 남이 버린 물건을 주어오는 자들을 쓰레기라 부르기도 했다. 이들은 곧 넝마주이로 불렸다. 구걸꾼은 남의 집이나 점포 앞에서한 푼을 요구하며 떼는 쓰는 자들이었다. 양아치라는 말은 한국전쟁 이후의 빈곤기에동냥아치가 변한 것으로 날치기에 가까운 자들이었다. 주로 깡패와 건달 사이를 오가는 자들로 거지 근성을 버리지 못한 이들을 부르는 비속어의 상징이었다. 최소한의 염치도 없는 자들로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는 자들을 이렇게 불러온 것이다. * 야하다라는 말은 1960년대 후반 이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농촌을 떠난 많 은 젊은이들이 직
이경철 시인의 초부리 시첩詩帖 5 입춘 지나 설날과 우수로 가는 2월, 순정한 새봄을 위해 2월처럼 밋밋하고 허탈한 달도 없을 것이다. 작대기 두 개, 가을과 겨울 사이에 허허롭게 껴있는 달이 11월이듯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그 사이에 껴 참 밋밋한 달이 2월이다. 정초의 작심(作心)이 무너져 그저 세월 속으로 흐르는 달이 2월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올 2015년도 달력을 보시라. 입춘이 있고 설날이 있고 꽁꽁 언 북녘 강물도 풀리는 우수도 들어있다. 전년도엔 설날보다 한참 뒤쳐졌던 입춘이 설날 앞서 갔고 설날은 또 우수와 겹치고 있지 않은가. 지각한 절기를 작년 윤달로 다 청산하고 올해는 일찍, 제철을 맞고 있지 않은가. 찬바람 맞고 있는 매화도, 언 땅속의 마늘도 꽃과 이파리를 틔울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는 2월이야말로 천지간 삼라만상의 시작일 것을. 바람은 차도 따스하도록 환한 햇살 속에는 이미 봄이 와 있지 않은가. 이곳 초부리 전원 속으로 이사한 이래 나는 24절기와 함께 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분명 감지하고 있다. 도심에서 포은대로를 달려 귀가하며 산 능선으로 커다랗게 떠오르는 달들이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변해가는 형상들을 보면서, 새벽하늘
오룡의 역사 타파(69) 영조의 위민 사상과 어느 전직 대통령의 자화자찬 허세의 차이점은 주어가 있고 없음 이다 18세기 이후 한양에는 거지들이 많았다. 왕이 사는 곳에 굶어 죽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오래된 왕도사상의 영향 때문이다. 전국의 거지들이 몰려든 혜화문 부근과 용산의 활인서에서는 날마다 죽을 쑤어야만 했다. 한 그릇 죽을 먹기위해 3000명의 굶주린 거지들이 몰려 들었다. 거지들의 대부분은 기근과 흉년으로 고향을 버리고온 빈민들 이었다. 왕이 나서서 배고픈 백성을 구휼하는데 신하들이 모른채 할 수 없었다. 서울의 부자들(대부분이 고위 관리였을)은 이때부터 거지들을 위해 빈자떡을 만들었다. 이 말이 변해서 유행가요에 나온 빈대떡이다. 돈 없으면 집에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에 나오는 빈대떡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영조 17년(1741) 좌의정 송인명이 도성에 떠돌아다니며 빌어먹는 자가 매우 많으니 5부의 관원으로 하여금 친히 살펴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자원하는 자는 양식을 주어 보내고, 한양에 남고자 하는 자는 진휼청으로 하여금 구제토록 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이에 영조는 백성들의 사정이 이와 같은데 군왕이 그것을 듣고 떠날
오룡의 역사 타파(68) 새나라의 어린이와 국민교육헌장, 애절양 그리고 진시황과 황희 -욕심이 없는 권력은 영원하다.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새나라의 어린이는 서로서로 돕습니다. 욕심장이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광복 직후 나온 윤석중이 작사한 창작 동요 새 나라의 어린이다. 1절보다 더 와닿는 내용은 2절이다. 1945년 815 당시의 어린이들이 원했던 세상은 부지런히 일하지만 서로 돕고 나누는 나라, 정의로운 나라의 건설이었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1968년 제정된 국민교육 헌장은 각종 기념식과 기념일까지 제정되어 1993년까지 국가 주도하에 이어져 왔다. 한민족으로서의 긍지, 개인 윤리 의식의 고취, 국민이 지켜야 할 도리, 개인과 국가의 일체감 형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던 시절이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어쩌면 그런 정신이 일정부분 시대적 공감을 얻은 측면이 있었기에 영화 국
이경철시인의 초부리시첩4 용인, 그 위대한 여정-포토 히스토리 100년 상설전시를 4월 초파일 정원에 모란꽃이 부처님 색시처럼 곱게 피어나자 사진을 찍어뒀다. 환한 햇살 바람에 엷은 비단 치맛자락을 휘날리던 큼직한 모란꽃을. 듬성듬성 눈이 덮인 초부리 야산 자락에 흰 눈의 정령처럼 우뚝 서 있는 자작나무 군락을 찍었다. 막 떠오르는 햇살에 하늘을 향한 자작나무 자디 잔 가지들이 빛살이 되어 찍혔다. 몇 십 년 전 신혼여행 때 명승지에서 사진만 찍어대던 부부들을 봤다. 남는 것은 사진밖에 없다며 풍광 감상보다는 사진 찍기에만 다들 몰두하고 있었다. 어찌 사진이 그때그때의 생생한 느낌을 대신하게 할 수야 있겠느냐며 그런 사람들을 속물로 여겨왔었는데 여기 용인 초부리에 정착하고부턴 계절 계절 놓칠 수 없는, 영영 아까운 풍광들을 나도 어느새 사진에 담아두게 됐다. ◇대성전 졸업식 1900년대 초 사진을 처음 접한 지구촌 오지의 원주민들은 대체로 카메라 앞에 서기를 죽기보다 싫어한다. 카메라가 자신의 목숨과 혼을 그대로 빼간다고 믿기 때문이란다. 피사체의 정령이 그대로 담긴다는 게 사진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심정이다. 어디 정령뿐이겠는가. 찍고 바라보는 이
경기도어린이집연합회(이하 경어련회장 최창한)는 지난 8일 수원 라마다 프라자 호텔에서 2015 을미년을 맞아 보육계 인사들을 비롯한 유관기관, 관계 공무원 등 2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신년 인사회를 개최했다. 이날 신년 하례식에는 경기도청 여성가족국 박정란 국장이 참석, 국무총리 표창 및 보건복지부장관상 전수와 축사를 했다. 또한 경기도의회 강득구 의장을 비롯해 도의원 및 31개 시군구 의원들과 유관기관 대표자들이 함께했다. 용인지회에서는 중앙 회장단과 분과장이 참석했고, 시립수지어린이집 전수경 원장이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최창한 회장은 그간 시군별로 장기간동안 보육부서에서 근무하며, 노고를 아끼지 않았던 공무원에게 감사패를 수여하기도 했다. 박경린 기자 yongindu@hanmail.net
수원 영통 시온여성병원이 2015년 1월 1일 보건복지부로부터 산부인과전문병원으로 지정 받았다. 전문병원이란 보건복지부에서 전국병원을 대상으로 의료의 질 , 의료서비스 수준, 환자구성비율 등의 총 7개 항목에 대하여 서류심사와 현장조사, 전문병원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전문병원으로 지정하는 제도이다. 산부인과 전문병원은 전국에 총 16개 병원이 지정받았으며, 수원,용인,화성 지역에서는 시온여성병원이 유일하게 지정 받았다. 시온여성병원은 올해 산부인과 전문병원으로 지정 받았을 뿐 아니라 지난 2013년 8월에는 의료기관인증까지 획득했다. 이를 통해 시온여성병원은 진료수준, 의료서비스와 환자 안전관리 측면에서 우수함을 정부로부터 공식 입증 받았다. 수원 영통 시온여성병원은 2004년부터 현재까지 유니세프 지정 모유수유 우수병원으로 아기에게 친근한 병원이다. 모유수유를 제일 많이 하는 병원, 모자동실을 운영하는 병원으로 유명하다. 또한 자연분만율이 높고 수원지역에서 분만건수가 가장 많은 병원으로 환자 만족도가 높은 병원이다. 시온여성병원 이승철 병원장은 앞으로 전문화된 진료와 최상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 할 것이며 무엇보다 환자중심의 진료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
고기리 세한도 -삶의 변화를 느낄 때 처음 이사 와서는 적응하지 못했다. 한 이틀 펜션에 머물러 온 것 같았다. 그것이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자 생존이 되어 버렸다. 갑자기 수도가 고장 나자 화장실은 물론 취사까지 모두 멈춰 버렸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든지 도망을 가든지다. 여기는 경비실도 없고 관리사무실도 없다. 내가 경비원이고 내가 관리인이다. 퇴원하고 한동안 요양을 할 줄 알았던 기대는 낯선 집에 적응하느라 흘러가고 있었다. 눈이 펑펑 쏟아졌다. 고기리는 온통 하얀 눈밭이 됐다. 이런 촌구석에서 눈을 떴을 때 그 묘한 감동과 불안이 교차한다. 아니나 다를까? 시간당 두 번 다니는 마을버스가 끊어졌다. 말 그대로 고립이다. 전에는 TV에서나 보던 풍경이 당장 내 일이 되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전화로 약속을 모두 취소하고 들르기로 했던 전시장도 사정상 못 나가게 되었다 연락하고는 카메라를 메고 집을 나선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그대로 쌓여 장딴지까지 빠진다. 도심형 사진가는 이런 아웃도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집 밖에 나오니 그 풍경이 펼쳐진다. 앞마당에서 이리저리 뛰는 쫑이가 애처롭게 날 바라본다. 목줄을 풀어주니 저
오룡의 역사 타파(67) 조선의 벽서와 괘서, 그리고 대한민국 대자보와 찌라시 1547년 9월 18일 양재에 붉은 글씨의 대자보가 붙었다.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여기서 여주는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 윤씨를 말한다. 윤씨는 동생인 윤원형과 함께 국정을 장악하고, 1545년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벽서에 등장하는 이기는 윤원형과 손잡고 젊은 사림들을 제거하는데 앞장선 인물이다. 윤원형 일파는 벽서를 권력 강화의 기회로 이용했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벽서 사건을 조작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외척과 일부 훈구세력들은 을사사화 때 쫓아내지 못한 선비들을 숙청하고, 20년 동안 독점적 권력을 유지했다. 국가의 기강은 무너졌고, 유랑민은 속출했으며 민심은 흉흉했다. 고리 백정이었던 임꺽정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3년 동안 왕조를 조롱했다. * 1980년대 대한민국 대학가는 대자보가 넘쳐났다. 1980년 광주에 대해 왜곡과 침묵으로 일관했던 땡전 뉴스에 맞선, 미처 말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대신 전하는 대안언론의 역할을 수행했다. 대자보
오룡의 역사타파(66) 조선의 특권층 조기교육 - 인격을 앞세운 통치를 위해서 였다 대한민국 지배층이 가진 강력한 무기는 경제력이다. 이것은 인격과는 너무 먼 거리에 있다. 조선시대 지배층이 가진 무기도 본질적으로는 경제력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은 노골적으로 경제력을 드러내진 않았다. 자신들이 경제력으로 사회를 지배한다는 인상을 심어주지 않으려고 조심한 것이다. 그들은 지적인격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자신들의 통치에 순종하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 것이다.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 사도세자가 받은 조기교육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두 살 때 글자를 배워 60개 정도의 글자를 쓰셨고, 세 살 때는 다과를 받으시자 목숨 수(壽) 자나 복 복(福)자 찍은 것만 잡수시고 () 또 천자문을 배우시다가 사치 치(侈)자와 넉넉할 부(富)자가 나오자, 치(侈)자를 손으로 짚고 당신이 입으신 옷을 가리키시며이것이 사치다라고 하셨다. 조기교육은 왕실뿐만 아니라 사대부에서도 실시되었다. 특권층 가문의 조기교육도 오늘날의 조기교육을 뺨치는 수준이었다. 고종 때 나온 민담집인 금계필담에는 김시습이 다섯 살 때
오룡의 역사 타파(65) 백성 버리고 도망친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자 최우, 그는 강화도에서 행복했을까? 1231년 몽골의 기병이 북계를 휩쓸었다. 안정기를 누리던 고려의 무신 정권은 맞서 싸우기보다 피난을 선택했다. 교정도감 최우에게 강화도 피난을 권한 사람은 풍덕군(지금의 개풍군)의 승천부 부사 윤린이었다. 윤린의 말을 들은 최우는 반대파들을 제거하고, 고종에게 강화로의 천도를 강요한다. 1232년 7월 6일, 강화도 피난길을 고려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드디어 천도하니 때마침 장맛비가 열흘이나 계속돼 정강이까지 진흙에 빠졌다. 사람과 말이 엎어지고 넘어졌다. 벼슬아치와 양가(良家)의 부녀들도 신발을 벗고 갈 지경이었다. 환과고독(鰥寡孤獨)은 갈 바를 잃고 통곡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피난의 아비규환을 뚫고 강화로 온 사람들은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방치된 본토의 백성들은 30여 년간 몽골의 말발굽 아래 목숨을 잃거나 포로로 끌려갔다. 살아남은 자들은 강화로 도망간 왕과 무신들을 위해 세금을 바쳤다. 몽골은 수시로 쳐들어 왔으니 삶과 죽음을 가늠할 수 없었다.강화의 원주민들은 어떠했을까? 피난 온 개경 사람들은 다수가 권력자이거나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