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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 조선일보 12월 19일 기사에 한국·러시아 다문화 자녀 1만여 명 ‘불법체류자 신세’라는 기사가 실려 유심히 살펴보았다. 조선일보 기사를 인용하면 한국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최 아무개(19) 씨는 두 나라에 모두 출생신고가 됐지만 한국 국적을 기준으로 살아왔다. 한국에서 초·중·고를 다녔고 주민등록증도 받았다. 그는 한국 여권으로 5차례 해외여행도 다녀왔다. 올해 초에는 병역을 다하기 위해 신체검사도 받았다. 그런데 최 씨는 입대를 위해 지난 6월 러시아 국적을 포기하려고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갔다가 ‘불법체류자’ 통보를 받았다. 한국 국적은 말소되고 러시아 국적만 가진 상태에서 불법으로 한국에 체류했다는 판정이었다. 최 씨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국인으로 살아왔는데 이런 황당한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항의했지만, 한국 국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구청과 주민센터에서는 “여권과 주민등록증을 잘못 발급해 줬다”라는 답변만 들었다. 최 씨처럼 자신도 모르게 불법체류자가 된 사례는 최대 1만 5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러한 사례는 2002년 러시아가 국적법을 개정하면서 시작된 일이다. 최 씨는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 영토가
[용인신문] 2023년도 이제 며칠밖에 남지 않았다. 2024년이 되면 올해보다는 나아지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걱정이 태산이다. 가구당 1억 원의 부채를 지고 있다는 우울한 뉴스가 서민의 가슴을 짓누른다. 게다가 노인빈곤율이 13년째 OECD 1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뉴스가 우울하다. 60세 이상이 곧 20%에 달하면서 초고령사회 진입이 확실시되는 한국 사회에서 노인 문제는 마냥 피할 수 없는 시한폭탄인 것이 확실해졌다. 2050년에는 60세 이상이 전체인구의 절반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을 접하면 더욱 우울해진다. 사회 일각에서는 ‘현재 65세로 되어 있는 노인 연령을 70세로 올려야 한다’라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노인의 비율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고 빈곤율은 13년째 압도적인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역대 그 어느 정부보다 안보를 강조하고 한미일 협조체제를 중시했다. 현재 한국은 안보보다 더 중요하게 발등에 떨어진 불이 가구당 1억 원에 달하는 가계부채와 압도적인 노인빈곤율이다. 대통령은 2024년부터는 외교·안보보다 민생(民生)을 우선시해야 한다. 대통령과 정부뿐만 아니라 국회의 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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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30년 전에 나온 광고 문구다. 광고주는 삼성이다.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전략의 상징과도 같은 문구는 신문과 방송에서 무차별적으로 쏟아졌다. 광고는 ‘승자독식 사회’의 선언문처럼 강렬했지만, 우리 삶 속으로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승자에게 부여되는 보상은 당연한 권리가 되었다. 다채로운 능력과 다양한 재능을 지닌 사람보다 어떤 분야의 천재가 세상을 구하는 존재로 대접받았다. 일등을 차지한 그는 자본주의 시장의 절대 신과 같은 존재였다. 승자가 차지한 독점과 독식의 세상이 물질 만능주의라는 비판이 따라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극단적 이기주의가 성공한 자산가의 이미지로 포장됐다. 서로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연대는 무너졌다. 이해관계가 아닌 만남은 부담스러워졌다. 고통에 대한 공감과 슬픔에 대한 나눔은 갈수록 버거워졌다. 만사형통, 자본과 권력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사회, 부의 세습으로 계층 이동 사다리는 사라져버렸다. 제로섬 사회와 하류사회, 잉여사회라고 자조하는 탄식의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사회적 공감과 소통의 부재는 민주주의의 퇴보로 이어졌다. 상대에 대한 존중이 무너지는 사회는 민주주의의 가치와 원칙을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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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 조선 말기는 민씨 척족의 세상이었다. 그중에서 별명이 ‘망나니’라 불리는 민영주라는 사람이 있었다. 보다 못한 민영휘는 고종에게 “저 망나니를 사람 만들려면 벼슬 한자리 주는 수밖에 없겠습니다.”라며 부탁했다. 이후 민영주는 월미도 개척권을 인가받아 그 이권을 일본인에게 넘기려고 모의하는 등 수많은 부정부패에 개입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 민영주를 고종에게 소개한 민영휘(본명 민영준)는 변신과 탐욕의 끝판이다. 중전민씨에 의해 주요 관직에 오른 그는 평안도 관찰사 시절에 고종에게 금송아지를 만들어 헌납했다. 재물을 모은 민영휘는 교육사업으로 이미지를 세탁했다. 1904년 광성의숙을 설립한 것이다. 고종은 1906년에 휘문의숙이라는 학교 이름을 내려 주었다. 조선이 망하던 시절에 일본에 빌붙었던 그는 국권피탈 당시에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민영휘는 1927년 휘문 교정에 자신의 동상을 세웠다. 우리나라 최초의 동상은 여전히 휘문고에 서 있다. 1936년 조선 최고의 갑부였던 민영휘가 죽었다. 그가 남긴 재산이 6000만 원이었는데 현재의 가치로 1조 2000억 원이라 한다. 황희는 24년간 재상직에 있었다. 사관은 실록에 이렇게 적었다.
[용인신문] 결론부터 말하자면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차라리 중앙아시아로 보내드리자. 처음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육사 교정에서 치운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눈과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이 아직도 친일파의 세상이라는데 절망했다. 지난 2018년 벽두,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있는 홍범도 장군 묘소에 성묘를 겸해 참배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한겨울 빙판길로 변한 열악한 도로를 10시간이 넘도록 달려서 찾아간 홍범도 장군의 묘소. 홍범도 거리라고 명명된 묘소 앞의 길을 조그만 태극기를 들고서 걸었다. 장군의 묘소는 잘 가꾸어져 있었고 근엄한 표정의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모셔져 있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도 홍범도 장군은 이렇게 존경받았고 20만 한인사회의 정신적인 지주였다. 홍범도 장군에 대한 한인사회의 존경심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섰다. 홍범도 장군은 1922년 말 모스크바에서 대한민국 항일 독립운동가 중에 최초로 블라디미르 레닌을 단독으로 만나 상아로 장식된 권총과 금화 100루블, 적군(赤軍)의 장교복을 선물로 받았다. 그 자리에는 볼셰비키 적군 총사령관 레프 트로츠키가 배석했다. 당시 막 수립된 소비에트 공화국연방(USSR)은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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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섭 다보스병원 더편한건강검진센터 센터장 다보스병원 더편한건강검진센터 전경 [용인신문] 주위의 지인들로부터 “암에 걸렸다. 어떤 희귀한 질환으로 고생하고 있다.” 등 좋지 않은 소식을 점점 더 자주 듣게 되는 현실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등은 그중 하나라도 없으면 이상할 정도로 신용카드처럼 하나씩은 갖고 다니는 것이 현실이 됐다. 첨단 의료 기술의 발달로 진단이 쉽게 되고 치료도 가능해져 기대수명이 남성은 81세 여성은 87세에 거의 다다르고 있다. 기대수명이 늘어날수록 그때까지 건강한 생활을 누릴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은 누구나 생각해 봤을 것이다. 우리는 각종 매체에서 질병의 무서움이 보도되는 것을 매일 접하며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건강 검진을 통해 현재 자신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고 질병을 조기에 발견하며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검진받는 사람들 대부분은 어떤 검사가 자신에게 필요하고 그 검사의 중요성은 무엇이며 얼마나 자주 받아야 하는지 모른 체 검진 센터에서 제공하는 검진 프로그램 중 하나를 선택해 예약하고 검진받는다. 그 결과 필요한 검사가 빠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불필요한 검사인데도 고가를 지불
[용인신문] “청소 미화원들은 웃으면 안 되나요, 웃는다고 그들이 괜찮다는 뜻은 아니죠” 순간, 생각이 많아졌다. 아파트 지하주차장 한 모퉁이에서 밥을 먹고, 화장실 변기가 옆에 있는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는 노동자들의 복지 문제를 얘기하던 참이었다. 모임 중의 한 사람이 점심시간에 청소 미화원들이 웃는 모습을 많이 봤다며 그들이 힘들다고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말에 되돌아온 대답이었다. ‘왜 사냐건 웃지요’라는 시조의 한 구절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웃음에는 많은 감정이 담겨있다. 삶의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때, 말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웃음으로 대답하기도 한다. 웃는다고 정말 괜찮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여의도 국회 앞에는 크고 작은 시위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날도 커피 한잔을 들고 시위 현장을 지나고 있었다. 추운 날씨에 휠체어에 몸을 맡긴 장애인들이 인권 보장을 외치고 있었다. 들고 있던 커피 한 잔의 여유가 불편해졌고 함께 할 수 없는 미안함으로 그 현장을 빨리 떠났다. 장애인 한 분과 눈이 마주치자 나 역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웃음에는 어색함도 미안함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몇 년 전 모 대학에서 미화원들에게 회의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