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지났지만, 유난히 추웠던 겨울 탓에 에너지 절약이 여전히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전 세계 국가들도 온난화를 막기 위한 기후협약 때문에 시끄럽고, 이를 반영하듯 우리나라도 에너지 절약 문제가 적잖은 관심사임에 틀림없다. 지난 해 연말 이명박 대통령조차 나, 내복 입었다고 했더니 정운찬 국무총리 역시 저도 그랬다며 맞장구를 쳤던 일이 언론에 보도된바 있다. 이 대통령이 국무위원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환담하던 중 에너지 절약을 위한 내복 착용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공교롭게도 용인시가 청사의 에너지 효율성이 낮아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래서인지 가끔 시청사에 들어가 보면 춥다고들 난리다. 그나마도 햇살이 들지 않는 응달쪽 좌석 공무원들은 두꺼운 외투까지 껴입고 일한다. 젊은 공무원들도 내복을 입어야 할 판이란다. 복도마다 중간 중간 불이 꺼져 있다. 어둡다 못해 스산한 느낌까지 든다. 민원실 에스컬레이터는 장식용이 된지 오래고, 엘리베이터도 일부 구간은 이용이 제한되어 있다. 세계 경제 불황 때부터 취해진 조치다. 하지만 기자 입장에서는 정말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건물은 지을 때 잘못 지었다고 치자, 그러면 앞으로 시 공무원은 계
민선자치시대 개막이후 지방선거 때마다 가장 볼썽사나운 것은 공직사회공무원들의 줄서기다. 또 출마예정자들의 정치권 줄대기와 비방전도 한 몫 한다. 공직선거법은 공무원의 선거 관여를 철저히 금지하고 있지만, 선거 때마다 관권 선거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단체장이 바뀌면 공직사회는 물론 유관기관 대표자들까지 대거 물갈이를 단행해 정치공무원 양산을 자초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는 선관위와 사정 당국의 허술한 단속망도 문제지만, 유력 후보자들 스스로 공무원 조직을 선거에 이용하려는 유혹을 극복하지 못 하기 때문이다. 용인지역 공직사회만 보더라도 이미 6월 지방선거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현직 시장의 재출마 여부는 물론 여야 유력 후보군들에게까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물론 일부 공무원들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선거철마다 원칙과 정도를 벗어나 줄서기에 앞장선 공무원들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지방자치 역사는 짧지만, 선거가 보여준 학습효과 덕분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모두 네 번의 지방선거를 치렀지만, 공무원들의 눈치 보기와 줄서기는 오히려 악화일로 양상이다. 이는 승진이나 보직인사를 우려한 몰지각한 공무원들이 보여준 공직사회의 부끄러운 자화
온 나라가 새해 벽두부터 기록적인 폭설과 한파로 재난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다. 간만에 겨울인 것 같아 좋긴 하지만, 역시 없는 사람들에겐 서러운 계절이다. 정치권은 예상했던 대로 연초부터 재난 현장인양 시끄럽다. 6개월도 채 남지 않은 지방선거를 의식해서인지 정치권의 열기는 이 추운 겨울을 다 녹이고도 남을 것처럼 후끈 달아올랐다. 지방선거가 끝난 6월 중순부터는 한 달 여간 남아공 월드컵이 열린다. 국민들은 또 하나의 신화를 기대하고 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대로 우리나라 스포츠 역사상 최대의 감동과 눈물을 자아냈던 2002년 월드컵. 과연 4강 진출의 신화가 또 한 번 이루어 질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그냥 기분 좋은 한해다. 물론 지방선거가 끝날 때까지는 정치권의 추잡한 싸움질을 눈뜨고 보아야 한다. 국민들의 인내를 시험할 고통의 시간이 될 것이다. 정치권만큼 비생산적이고 반민주적인 현장은 없으니까. 벌써부터 좁은 땅덩어리에서 지역분할구도가 확연히 보이기 시작했다.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한 세종시 법안이 말썽이다. 정부가 내놓은 수정안을 둘러싸고 벽두부터 난리법석이다. 분명한 것은 세종시 문제가 4대강 못지않은 정치 쟁점으로 둔갑, 자칫 6월 지방
인간의 생애는 시간의 처음과 끝을 되풀이하는 수레바퀴다. 지금 또 다시 시간의 끝을 맞이하고 있지만, 끝은 바로 처음의 출발점이요 종착역이다. 고로 처음과 끝은 같은 것이니 어느 것에 무게를 더 둔다한들 무슨 상관이랴. 매년 연말이면 언론사에서는 한 해 동안의 빅뉴스를 선정한다. 매일 처음과 끝을 반복한 기억속의 시간들을 끄집어내 이미 잊혀 졌을지도 모를, 아니 잊고 싶어 하는 사건들까지 속속 끌어내는 일이다. 전 세계와 우리나라 뉴스, 그리고 지역 뉴스까지 다사다난했던 한해가 파노라마처럼 스쳐갈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역사와 시간이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마지막 남은 잎 새를 보고 슬퍼하거나 존재의 이유 또는 인생의 무력함에 몸을 떠는 사유의 동물이 인간이다. 마지막 잎 새가 새로운 탄생을 위한 순회임을 모르는 바 아닐진대. 지나간 시간들을 백지위에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무엇을 그릴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봐도 그릴 것이 없다. 그렇다고 다가올 시간 역시 마땅히 그릴 것이 없으니 이를 어쩔까. 무상무념(無想無念). 몸도 마음도 비워야 건강하거늘, 정작 우리는 채우지 못해 발버둥치는 소유의 노예가 되어 온갖 영육의 질병
용인신문이 창간 17주년과 지령 800호 기념으로 용인시의 문화예술정책 방향을 진단한다는 주제로 지역 전문가들을 초청해 토론회를 가졌다. 가장 뜨거웠던 이슈는 가칭 용인문화재단 설립에 대한 필요성 여부였다. 급속한 도시화 등에 힘입어 지난 10여 년간 지역문화예술계 역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고, 시민들의 욕구 또한 갈수록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재단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된 이유를 분석하면, 가장 큰 이유는 현 문화예술 행정시스템으로는 지역 문예진흥이 역부족이란 점이다. 물론 다른 지자체에서 보여준 문화재단의 폐해 때문에 여전히 부정적인 시각도 적지 않았다. 기구의 독립성 확보와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실질적 도움이 안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엔 수많은 지자체들이 예술행정에 민간참여를 늘리고 있고, 일정 부분은 민간에게 넘기는 게 시대적인 추세라고 한다. 따라서 용인지역에서도 그런 기능을 할 수 있는 문화재단이나 지역문화예술위원회를 설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다. 다만 민간의 역량을 어떤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실제 용인시도 각종 공연시설이 늘어나면서 다른 지자체들처럼 문화예술분야에 비공무원들이 수혈되고 있다. 하
풀뿌리 민주주의의 바로미터인 지방자치제. 과연 이 땅의 주민자치가 올바로 실시되고 있을까. 우리나라 지방자치제는 격변기에 태어났기 때문인지 반세기가 지났어도 자리매김을 못하고 있다. 부정적인 사람들은 폐지론까지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방자치제는 1948년 제정된 초대 헌법부터 명문화된 제도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불안정한 사회분위기를 내세워 첫발도 떼지 못한 지방자치법을 개정, 보류시켰다. 첫 시행은 한국전쟁 기간 중이었던 1952년도였다. 그것 역시 이승만 정권이 재집권을 위한 전략적 시나리오였다. 재집권에 성공한 이승만 정권은 제2차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모색한다. 이유인즉, 지방의회가 지방자치단체장에 대해 잇따라 불신임을 결의해 단체장들이 고유 업무에 차질을 빚는다는 것. 그때도 단체장과 의원들 사이에 청탁이나 이권거래가 성했던 모양이다. 이승만 정권은 1956년 2월 지방자치법을 개정했지만, 5개월 만에 또다시 개정한다. 야당이 승리할 경우 최고 권력자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것이다. 불과 2년 후인 1958년 12월에도 자치단체장을 임명하는 중앙집권적 통치체제 구축을 위해 지방자치법이 개정된다. 지방자치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
몇 달 전 용인지역 선후배들과의 술자리에서 우연히 예강환 전 용인시장을 만났다. 기자는 예 전시장이 현직에 있을 때 용인시청 출입 기자였고, 그 시절에도 술자리를 했던 기억이 있어 매우 반가웠다. 예 전시장은 관선시절 용인군수를 지냈던 경력이 있었고, 민선시장까지 역임했다. 그러니 용인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런데 고향이 용인이 아닌 화성이라는 것 때문에 선거철마다 묘한 텃새에 시달려야 했고, 선거에서 떨어지면 화성으로 갈 사람이라는 정치공세를 받아야만 했다. 선거철엔 없는 사실도 만들어내는 판이니 지역출신인 다른 후보들에겐 호재였을 것이고, 본인에게는 어쩌면 악재 중 악재였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선거이후엔 그의 거취에 관심을 두었던 정객들도 적지 않았을 터이다. 과연 예 전 시장이 용인에 계속 살 것인지 아닌지를. 예 전시장이 야인으로 돌아온 지 그로부터 거의 10여년이 되어가지만, 그는 여전히 용인에 살고 있다. 그것도 아주 평범한 시민으로 조용히 살고 있다. 현직 시절에도 조깅을 즐겨하던 그였기에 물어보니 예전만큼은 못해도 여전히 운동을 좋아한단다. 불과 10년 전만해도 당적 변경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철새 정치인, 지역정치인이 아
용인에서 약천 문학제가 열렸다. 약천(藥泉)이란 말은 물론 용인과 약천의 연계성이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향토사에 관심이 있든 없든 지역사회에 알려지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라는 시조는 많은 국민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시조 작가가 바로 조선 후기의 문신인 약천 남구만(南九萬1629~1711)이다. 약천 문학제가 용인에서 열린 이유는 선생이 오랫동안 용인에 거주했기 때문이다. 약천 묘소와 사당(별묘)도 용인에 있고, 의령 남씨 문충공파 후손들도 용인에 많이 살고 있다. 약천문학제를 준비한 용인문학회는 시를 쓰며 문청을 자처하던 기자가 1996년 지역문인들과 함께 창립한 향토문학단체다. 이후 10년 넘게 용인문학 신인상 공모전, 용인문학 아카데미 시창작반, 용인시 문학의 밤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나름대로 지역문학운동을 펼쳐왔다. 그렇지만 기자를 비롯해 지역문인들은 향토문학의 정체성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의 뿌리가 있어야 현재와 미래가 있다는 나름대로의 원죄의식 같은 마음을 가졌던 탓일까. 몇 년 동안의 숙고 끝에 약천 남구만 선생을 기리는 문학제를 기획 추진하게 됐다. 다행이 약천 선생 후손들이
한국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또 실패했다. 최근엔 해마다 고은 시인이 노벨상 후보자로 올랐던지라 많은 국민과 언론의 실망 또한 클 것이다. 그런데 기자는 노벨문학상 발표 때마다 한국문학이 정말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를 생각한다. 솔직히 회의적이다. 그렇다고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은 아니다. 무엇보다 한국문학이 세계인들에게 얼마나 소통되고 있는가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벨문학상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문학이 올바로 번역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동안 한국문학을 올바로 세계에 소개할 번역가조차 체계적으로 양성하지 못했다. 그만큼 한국문학의 해외 번역 수준은 걸음마 단계인 것이다. 지난 2001년 설립된 한국문학번역원은 8년간 26개국 언어로 380여 권의 한국문학을 해외에 소개했다. 그런데 두 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일본은 1945년부터 무려 2만 여종의 문학작품을 번역해 해외에 소개했다. 그만큼 국가 차원의 전략적 작품 번역 지원이 중요함을 의미한다. 또한 전문가들은 우리의 문화와 한글을 잘 이해하는 수준 높은 현지 번역가 양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문자의 힘은 무한한 상상력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사회에서는 언제부턴가 우
가을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그런데 요즘엔 산행 못지않게 자전거 열풍이 뜨겁다. 지난 주말엔 기자도 처인구 운학동부터 포곡읍 에버랜드까지 자전거를 탔다. 초등학교 4학년짜리 아들 명수와 함께 물길을 따라간 운행거리는 총 43km 였다. 자동차 거리로야 얼마 안 되지만, 마라톤 풀코스 42.195km와 100리(40km)길 보다는 먼 거리였다. 자전거 전문가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겠지만, 초보자 아빠와 초등학생 입장에서는 체력보단 마음의 용기가 더 필요했던 게 사실이다. 다행히 청명한 가을 하늘과 풍요로운 들녘, 그리고 색색의 코스모스 길을 달리는 기분은 정말 운치 있었다. 그 덕분에 체력 부담감도 상당부분 줄었고, 또 다른 용기와 희망까지 갖게 되었다. 우리는 운학동 내어둔 마을의 집을 출발해 하천변 자전거 길을 탔다. 마평동을 경유한 후 고림동 이삭아파트 주변의 시골길과 하천변을 달렸다. 고림동 외곽을 지난 후에는 포곡읍 금어리~둔전리~전대리 에버랜드 앞길까지 갔다가 유방동~김량장동~역북동에 있는 용인신문사까지 갔다. 다시 김량장동~남동~운학동을 돌아 무사 귀환했던 것이다. 돌아오는 길엔 분위기 있는 포시즌(중국음식점)에 들러 다른 손님들이 타고
1900대초에는 전 세계적으로 독감이 대유행 했다. 전염병과 역병 연구자들은 1918년 가을부터 1919년까지 독감 사망자가 무려 2000만 명에서 1억 명이 될 것으로 추정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전쟁이란 죄악을 저지른 인류는 결국 인플루엔자(돌림고뿔)라는 대재앙을 맞이했고, 급기야 식민지 조선까지 덮쳤다. 일본은 2100만 명이 감염되어 26만 명이 사망했고, 조선은 740만 명이 감염되어 14만 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인구 비율로 본다면 주거환경을 비롯해 위생과 영양상태가 열악했던 조선이 더 많은 사망자를 낳았다. 흑사병은 대륙과 세기를 뛰어넘어 창궐했었고, 독감 변종 바이러스는 현대 과학문명의 이기를 심판이라도 하듯 현재 진행형이다. 일명 돌림고뿔이란 감기는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인류는 또 다시 신종인플루엔자 위기를 맞았다. 과거의 독감 기록들에 비하면 최근 신종 플루 발생자와 사망자수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낮은 수치다. 그리고 발병원인도 몰랐던 과거와는 달리 예방백신과 치료약이 개발되어 있는 만큼, 보건당국의 관리대처 능력이 관건일수도 있다. 지난 2005년 9월말, WTO는 조류독감 변종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인
14세기 중세 유럽사회를 붕괴시킬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던 흑사병. 당시 사람들은 흑사병이 왜 생기는지 몰랐다. 막연하게 거지, 유대인, 한센병 환자, 외국인들이 흑사병을 몰고 다닌다고 믿었다. 그래서 죄 없는 그들을 집단폭행하거나 학살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흑사병은 박테리아의 일종인 예르시니아 페스티스가 원인균이다. 이 균에 감염된 쥐의 혈액을 먹은 벼룩이 사람의 피를 빨면서 병을 옮겼다. 다음은 당시 상황을 기록한 글이다. “매일 밤낮으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 역병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머지않아 온 땅이 묘지로 덮이리라. 나, 아그놀로 디 투라 또한 다섯의 아이들을 내 손으로 묻었다. …… 이 수많은 죽음을 목도하며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이 왔다고 믿었다.” 흑사병은 14세부터 17세기까지 창궐했고, 18세기에도 이어졌다. 1940년에는 중국 동북부의 농안과 장춘에서도 발생, 731부대의 연구대상이 되기도 했다. 유럽, 중앙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 등에서 창궐한 흑사병 희생자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망율을 기록했다. 14세기 유럽의 흑사병 희생자는 총 7500만 명에서 2억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됐다. 유럽 인구의 절반이 감소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