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이유 없이 싫은 사람이 있고 이유 없이 좋은 사람이 있다. 이유 없이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받기도 했고 이유 없이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기도 했다. 누구나 모두를 공평히 친절하게 대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인간이란 차별당하고 또 차별하는 존재이다. 자신이 처한 곳에서 미움을 받는다면 중이 절 싫으면 떠나듯 떠나면 그만이다. 그러나 단순이 친교모임이 아닌 자신의 꿈과 미래와 생계가 달렸다면 누구든 쉽게 벗어날 수가 없다. 그것을 알고 있는 자들은 그 약점을 이용한다. 그들은 약자에게 잠재적 폭력성을 드러낸다. 국가대표 트라이애슬론 최숙현 선수가 목숨을 끊었다. 팀 닥터와 코치와 감독과 선배선수의 가혹행위에 시달렸다는 유언을 남겼다. 최악의 선택을 하기까지 그녀는 이들의 폭행을 고발하고 단체에 도움을 요청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다. 누구도 그녀의 호소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체육계의 비리와 폭력사태는 우리에게 더 이상 놀랍지 않다. 지난해 유명 축구감독의 횡령과 학부모 성폭력 사건, 국가대표 빙상 코치의 지속적인 성폭력 사태로 우리의 분노 게이지는 이미 최고점에 도달했었다. 지난 9일에는 피겨 유망주의 어머니가
[용인신문] 코로나 19는 내게도 작업의 변화를 줬다. 사람이 모이는 강연의 줄줄이 취소됐고 전시장은 문을 닫았다. 대신 홀로 카메라 들고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그래서 주로 찾은 곳이 우리 북쪽 변경이랄 수 있는 파주 연천 철원 같은 곳이다. 비무장지대에 가까운 이곳은 한반도 평화에 무척 민감해 남북관계 호전과 악화에 일희일비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통일이 다가 온 것처럼 전방 GOP(관측초소)들이 폭파되더니 얼마 전에는 관계가 악화 돼 개성의 연락사무소가 폭파되는 반전이 일어나고 말았다. 사진을 찍기 위해 이곳을 찾은 나 역시 주민들의 그런 분위기를 금세 파악한다. 거리에는 사람이 없고 관광객을 더욱 찾을 길이 없다. 그렇게 텅 비고 낡아가는 마을을 찍는 나도 마음이 편할 리 없다. 이 사진 작업은 통일부의 ‘DMZ 지도’라는 프로젝트의 일부였다. 3년에 걸쳐 비무장지대와 인근 지역을 취재해 방대한 북쪽 변경의 정보를 지도라는 형식으로 담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남북연락사무소가 폭파되자마자 장관을 사직했고 이 사업도 미래가 불투명해졌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면 작은 기록 사업마저 추진하던 기관의 변동으로 취소되는 판에 현지 주민들의 절실한 숙원
[용인신문] 나의 소원은 (한)반도의 대륙화이다. 내 소원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라 하더라도 이런 소망을 가져 본 적은 있을 것이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베이징에 가서 점심을 먹고 싶다는…. 사전에서는 소원과 소망은 ‘바라고 원함’으로 같은 의미다. 하지만 일상에서 사용할 때 조금 차이가 나는 부분도 있다. 소원은 신념의 문제로, 주체자가 바라는 것으로 작동될 때 사용한다. 오래도록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으니까. 소망은 신앙과 믿음의 영역에서 작동된다. ‘바라보는’ 대상을 향한 ‘바라보기’의 타동사로서 존재한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해석의 행위일 뿐이다. 지금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가? 묻는다면, 대게는 자기 자신, 가족, 연인… 까지는 술술 나올 것이다. 그리곤 제각각 다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 순간 내게 문제가 발생하면, 생면부지(生面不知)의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가능성이 많다. 죽고 못 살 듯이 사랑해도 ‘곁에 없는 이’는 소용없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대륙화는 아직 기다려야 하는가. 죽은 지 40년이 지났어도, 또 30년이 가까워도 이들을 향한 맹목적인 구애(求愛)는 여전하다. 오늘도 이들과 그들의 소원은 한결같다. ‘까부수자, 타
[용인신문] 한 부부가 맹렬한 싸움 끝에 서로 말을 하지 않고 꼭 해야 할 말이 있으면 글로 쓰기로 했다. 다음날 출장을 가게 된 남편은 새벽차를 놓칠까 봐 어쩔 수 없이 부인에게 “내일 아침 4시에 깨워 줘요.”라고 적은 쪽지를 건넸다. 이튿날 아침 눈을 떠보니 4시는커녕 벌써 7시가 지나고 있었다. 화가 잔뜩 난 남편이 부인을 깨우려고 하는데 자기의 베개 옆에 종이쪽지가 보였다. “여보, 일어나세요. 벌써 4시예요.” 부부가 몸과 마음이 따로일 때 일어날 수 있는 우스갯소리다. 그렇다. 소통이 안 되면 고통이 찾아온다. 상대가 자신의 의견을 경청하듯이 자신도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라는 의미의 사자성어로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있다. 이 말은 사서 가운데 맹자(孟子)의 ‘이루(離婁)’에 나오는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에서 유래한 말이라는 설과 삼경 가운데 ‘주역(周易)’에서 유래한 말이라는 설이 있다. ‘역지즉개연’은 처지나 경우를 바꾼다 해도 하는 것이 서로 같다는 말이라고 한다. 얼마전 개원한 21대 국회를 보면서 더욱 생각나는 말이다.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하거나 말을 하는 이유 등은 아예 듣지도 않고 자기의 주장만 앞세워 상대를 굴복시키려 애쓰는 것
[용인신문] 예로부터 용인은 교통의 요충지였다. 조선 초기에 홍귀달은 <용인신정기>라는 글에서 용인은 삼남지방에서 한양으로 이르는 길의 목이라고 하였다. 조선후기의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제4대로의 노정은 한양에서 출발하여 한강-판교-용인-양지-광안-충주로 이어지고, 다시 조령을 넘어 유곡-낙동진-대구-부산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용인은 전국 도로망의 요충지였던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경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가 교차하는 유일한 도시가 용인이다. 제2경부고속도로와 새로 조성되는 서울-지방간의 내륙도로는 용인을 빗겨갈 수가 없다. 결국 땅의 쓰임새는 정해져 있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산천이 크게 변하지 않았는데, 달라질 이유가 없다. 현재의 용인은 조선 초기에 용구현과 처인현,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용인군과 양지군이 병합되어 형성된 도시이다. 구성 지역과 양지 지역의 중간쯤 되는 곳에 인위적으로 조성된 셈이다. 이후 동부권과 서부권의 도시 형성 과정에서 격차가 커지다 보니, 균형 있는 발전이 정책과제였다. 지금의 용인시 청사 위치를 용인의 중앙에 정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용인시정 발전 계획에서 ‘균형’과 ‘조화’ 가운데 굳이 하나만 선택
[용인신문] 10년 전 필자는 강남역 카페에서 중년 남성 여럿이서 하는 얘기를 엿들은 적이 있었다. 그들의 넥타이와 손목시계에서 돈 냄새가 났다. 그들은 사업얘기를 했는데 특히 자선사업에 대해서였다. “돈 벌려면 자선단체 세우는 게 최고”라고 그들은 말했다. 영화산업에 대한 얘기도 했는데 “김기덕은 안 되고 봉준호에게 투자해야 한다”라고도 했다.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이사장에 대한 각종 의혹들이 쏟아져 나오자 필자는 10여 년 전에 강남 어느 카페에서 엿들은 말들이 떠올랐다. 인간이 모이고 돈이 모이는 곳에 티끌 하나 없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의연의 오랜 활동과 노고를 알고 있기에 실망도 큰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알고 싶다. 과연 이용수 할머니의 발언대로 할머니들이 이용당한 것인지, 아니면 언론과 함께 누군가 이용수 할머니를 부추기고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그 저의가 무엇인지. 처음 이용수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자라고 신고했을 때 “저는 피해자가 아니고 제 친구”라고 했다는 것이 사실인지도 궁금하다. 만약 <정의연>을 고발한 측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윤미향 이사장은 모든 것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설령 정의연의 위법행위가 언
[용인신문] 30년 전 중국 둔황에 처음 갔었다. 고비사막이 펼쳐지며 서역으로 가는 실크로드의 관문, 오아시스 도시가 둔황이다. 발이 푹푹 빠지고 미끄러지기도 하는 사막을 걷고 또 걸어 모래산 명사산에 올랐다. 서역 하늘과 사막을 아득히 물들여가는 노을도 보았다. 그러다 해 지면 도심으로 돌아와 야외 무도회장을 구경하곤 했다. 극장 앞 조그만 광장에 남녀노소들이 모여들어 밴드 연주에 맞춰 춤을 춘다. 여럿이 군무를 추기도 하고 또 블루스 같은 쌍쌍의 춤을 추기도 한다. 러시아나 몽골 등 사회주의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예의 TV 화면 속 평양도 그렇고. 그런 무도회를 며칠간 밤마다 구경하며 황량한 사막 가운데 있는 조그만 오아시스 도시에서 인간과 사회와 문화, 그리고 예의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블루스를 추면서 가슴이 닿을 듯 말 듯한 적당한 거리 유지가 그리움과 인간에 대한 예의를 낳고 또 야만이 아니라 문화와 문명을 낳은 거라고. 이런 거리에 대한 실감적 명상을 위해 그 후로도 대여섯 차례 실크로드 사막기행을 해오고 있다. 사그라지던 코로나 19 집단전염 불씨가 서로 몸 부비고 소리소리 지르며 춤추는 이태원 클럽발로 되살아나고
[용인신문]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햄릿>의 실존적 고민을 드러내는 명대사다. 음모와 술수,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 찬 궁중은 왁자지껄했다. 은폐와 모략을 감추려는 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햄릿을 유혹했다. 고뇌하던 햄릿은 침묵의 공간에서 독백으로 외쳤다. 하지만 빈 줄만 알았던 침묵의 공간은 결코 비어있지 않았다. 사악한 세력에 맞설 용기는, 꼭 말로만이 아닌 끊임없는 행위로 햄릿을 응원했다. 빈 공간 속 다수의 관객들은 ‘때맞춰 손뼉 치기, 깊은 한숨 쉬기, 대놓고 감탄하기’를 통해 말보다 격한 감정으로 지지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영화가 아닌 연극으로 오래 살아남는 이유다. 가끔은, ‘분노’도 강력한 단합으로 표현된다. ‘분노’는 조절의 문제를 넘어, 주체자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남용되고 혼용되는 경우에서 그렇다. 특히 많이 가진 자의 분노 표출은 법적으로 선처되고, 약자의 분노는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폭력으로 범주화 시키는데 ‘화’가 난다. 그러니 분노의 ‘인과’를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 우리는 오래도록 도덕의 묵시적 규범으로 ‘흥분하지 말라’와 ‘참으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다. ‘가만히 있으
[용인신문] 고다이바 부인은 11세기 영국의 코벤트리 시(Coventry)의 영주(領主)인 레오프릭(Leofric)백작의 부인이었다. 어느 날 백작 부인은 영주의 혹독한 세금징수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다는 사실을 알고 백작에게 몇 번씩이나 세금을 감면해 주기를 간청한다. 그러나 백작은 “당신이 알몸뚱이로 말을 타고 코벤트리 시내 거리를 한바퀴 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야!”라고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백작 부인은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공중의 행복을 위하는 일이라면” 알몸으로 말을 탄들 어떠랴 하는 심정으로 말을 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코벤트리 시의 시민들은 이 소식을 듣고 부인이 말을 타고 거리를 돌 때에는 누구도 창문을 굳게 닫고 내다보지 않기로 결의를 하였다. 고다이바 부인은 긴 머리카락으로 앞을 가린 다음 알몸으로 말을 타고 시내 거리를 돌기 시작했다. 시민들도 약속대로 말을 타고 거리를 누비는 고다이바 부인을 창틈으로라도 엿보는 사람하나 없는 듯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호기심 많은 재단사 톰(Tom)이라는 사나이만은 시민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창문 틈으로 그 부인의 알몸을 엿보았다. 그 순간 그 톰이라는 사나이는 그만 두 눈이
[용인신문]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는 4차에 걸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해 연평균 경제 성장률 9.7퍼센트를 기록했다. 경제성장을 이룩해 북한공산주의자들을 이긴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워 박정희 정부는 국가 비상사태 선포, 8.3조치, 유신헌법, 노동 3권의 제약 등을 통해 국민의 자유와 생존권을 유린했다. 이러한 개발독재에 의한 산업근대화는 많은 부작용을 불러왔다. 그 부작용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이 환경문제였다. 이것은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삶을 영위해 왔던 사람들이 당면했던 문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개발독재 시대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이 겪기 시작한 생태위기는 기존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위기와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위기였다. 그것은 인간 생존에 관한 위기이며, 인간 행위의 총체적인 위기였던 것이다. 용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용인’하면 떠오르는 말이 ‘난개발’이었다. 특히 수지구와 기흥구의 난개발은 전국적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 악명을 떨쳐내 버리려고 용인시가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 신도시급 택지개발지구가 동백지구이다. 용인시가 원대한 뜻을 품고 조성한 동백지구는 시간이 흐를수록 빛이 바래지고 있다. 동백지구 바
[용인신문] 코로나-19의 유행으로 사라진 풍경이 있다면 봄철 꽃나들이다. 이른 봄 광양의 매화가 유명하지만 꽃놀이의 하이라이트는 벚꽃이다. 진해가 유명하고 서울 국회 앞 윤중로가 인기가 높다. 그 화사함이 사람들로 하여금 봄을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는 꽃이다. 근데 이 벚꽃의 원산이 일본이라는 설도 있지만 왕벚은 우리나라에서도 자생하던 나무이니 근거 없는 것이다. 일본은 우리의 벚꽃놀이 보다 훨씬 더 왁자지껄한 이벤트를 벌인다. 얼마 전 코로나-19에도 아랑곳없이 인파가 몰려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아름답고 화사한 벚꽃이 일본어로 사쿠라(櫻. さくら)라고 발음되는 순간 그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사쿠라는 곧 사기꾼이란 의미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일본 말 사쿠라는 대충 3가지 뜻이 있다. 1. 벚꽃, 2. 말고기, 3. 야바위꾼이다. 어떻게 꽃이름과 말고기, 야바위꾼이 같은 뜻으로 공존하는 것일까? 알고보면 다 꽃과 관련이 있다. 말고기의 경우, 메이지유신 이후 육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된 일본에서 소고기를 잘 구분 못하는 사람들에게 벚꽃처럼 붉그스레 한 말고기를 내놓고 소고기로 팔아 사기꾼을 사쿠라라 했다는 설이다. 야바위꾼은, 벚꽂 만발한 행사장의
[용인신문] 유례없는 경제위기를 불러온 코로나19(COVID-19)와 관련된 뉴스가 대부분이지만 빠지지 않은 큰 부분이 제21대 총선이야기다. 이제 각 정당은 후보자 공천을 끝내고 후보자 등록을 마쳤으니 오는 4월2일부터 선거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후보자들은 당내 면접에서 살아남아 경쟁자들과의 경선를 넘어 공천을 받아 본선에 이르렀다. 여기까지 온 것에 대하여 먼저 축하의 말을 전한다. 그런데, 국회의원 후보자들이 길거리에 큼지막하게 걸었던 예비후보 현수막을 본 느낌은 유쾌하지 않았다. 불법도 아니고, 국회의원 자리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인정하면서도 첫 길목부터 꼼수로 보였기 때문이다. 당선이 최종 목적이므로 당연히 후보자 본인이 국회의원이 될 것이라고 각인시키는 하나의 홍보 방법임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국회의원 후보, 그것도 예비후보일 뿐이고, 출마하겠다는 것을 알리는 것임에도 마치 현직 국회의원인 것처럼 보이도록 ‘예비후보’라는 글짜가 멀리서는 거의 안보이도록 하여 본인의 희망사항만 주입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제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였던 국회의원들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전문가로서나 성품으로도 훌륭하다고 인정받는 사람들로 정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