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라는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폭풍우) 에서 차용해 왔다. 템페스트에는 미란다라는 여성인물이 ‘아름다운 세계’라고 하는 말이 나온다. 동생에게 쫓겨난 아버지와 외딴 섬에서 살던 미란다는 난파선에서 내린 사람들을 보며 아름답다(Brave New World)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아버지를 해치려고 했던 인물들이니 아이러니한 상황이 된다. 멋진 신세계도 제목과 내용이 아이러니한 관계에 있다. 이상적인 세계를 만들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인간적인 가치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 작품속에서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세계관은 “공동체, 동일성, 안정성”이다. 이를 위해 개별성이나 다양성이 무시되고 인공수정과 교육을 통해 계급을 유지한다. 충만한 사랑으로 태어나야 할 아이들을 공장에서 생산하며, 사랑이라는 감정을 야만으로 치부한다. 소설에서 아이들이 꽃과 책을 증오하게 만드는 훈련과정은 주도면밀하다. 지배계급을 만드는 과정 역시 정교하게 설계되어 오랜기간 빈틈없이 진행된다. 효율이 중요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엇이든 수단으로 쓸 수 있다. 목적을 위한 수단이 궁극적으로 멋지지 않은 상황이다. 이 모든 것을 보여준
[용인신문] 메타버스는 닐 스티븐슨(Neal Stephenson)이라는 미국의 SF작가가 쓴 소설 『스노우 크래시(Snow crash)』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으로 가상세계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소설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원』(2018)은 ‘오아시스’라고 하는 가상세계를 실감나게 보여 주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메타버스라는 개념은 더욱 중요한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저자는 메타버스를 ‘나를 대변하는 아바타가 생산적인 활동을 영위하는 새로운 디지털 지구’(38쪽)라고 말하며 메타버스의 세계관을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필자는 메타버스의 특징을 다음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가상과 현실의 기억과 정보가 연결되고, VR혹은 AR 등의 기기를 이용해 실재감을 끌어올린다. 가상의 아이템을 구매하기 위한 화폐는 현실과 상호 연관되며, 여러 사용자가 동시 접속할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메타버스가 현실 경제에 미칠 영향이다. 메타버스에 시중은행이 가상점포를 열기 시작했다는 것은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예시이기도 하다. 게임은 이미 메타버스의 개념을 구현하고 있다. 넷플릭스 등과 같은
[용인신문] 『동물농장』, 『1984』라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조지 오웰의 산문집 『코끼리를 쏘다』는 오래 전에 출간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앞의 현실을 살피게 하는 도서이다. 전체주의도 폭군도 거의 사라졌지만 여전히 민주주의는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총 다섯 부에 걸쳐 소개되는 조지 오웰의 산문은 식민통치에 대한 환멸과 도시에 사는 약자들의 모습, 그의 문학에 담긴 정치성, 유럽 문학에 대한 조지 오웰의 생각 등이 포함되어 있다. 어려서부터 뭔가 글을 열심히 적은 조지 오웰은 일찍부터 자신이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소명의식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이 글을 쓴 동기를 크게 네 가지로 소개한다. 작가로 살고자 하는 염원과 예술가로서 미학적 성취를 이루려는 목적이 있는가 하면 역사적 · 정치적 충동에서 비롯된 글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지 오웰은 자기 자신에게 냉철했다. “나의 작품을 돌이켜보건대, 정치적 목적이 결여 된 곳에서 내가 한결같이 화려한 문체, 의미 없는 문장, 쓸모없는 장식적 형용사 등에 유혹당한 생명 없는 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90쪽)고 말하며 자신의 글을 반추하기도 했을 정도다. 산문집은 소설과 달리 작가 내면의 실체
[용인신문] 덴마크 출신의 작가 안데르센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은 2년에 한 번씩 선정된다. 이 상은 작가의 특정 작품이 아닌 전반적인 작품을 검토해서 선정하기 때문에 받기가 매우 어려운 상이다. 그런 상을 우리 이수지 작가가 받았다. 이수지 작가의 약력을 보면 그의 글로벌 역량이 아주 오래 전부터 발휘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번 수상은 한국 문화가 이루어낸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의 최근 작품 중 『여름이 온다』는 2022년도 볼로냐에서 열린 아동도서전에서 라가치상을 받았다. 『여름이 온다』는 이수지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그림책이다. 음악은 이수지의 상상을 자극하는 또 다른 길이었다. 가족들과 여름날 마당에서 했던 물놀이의 추억이 음악과 어우러져 한 판 마당놀이를 하듯 그림책에 펼쳐진다. 비발디의 ≪사계≫중 여름은 현악기들의 연주에 의해 지면에서 화창한 여름날과 보슬비와 비 바람 천둥 번개와 같은 것들로 변신한다. 거친 선이 주는 비바람이나 독특한 색이 주는 싱그러움이 돋보이기도 한다. 음악에 흠뻑 젖은 등장인물은 여름날 물과 비와 놀이가 하나되어 한판 마당놀이를 보는 듯한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그림책은 글과 그림의 리듬
[용인신문] 김숨은 1974년 울산에서 태어나 바지런히 소설을 쓰는 작가이다. 다수의 수상경력(허균문학작가상, 대산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동리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은 그 노고의 결과물일 것이다. 대선과 강원지역 산불로 나라가 들썩이는 시간에 우리가 잊은 것은 무엇일까? 김숨의 『듣기 시간』을 들여다보며 3월을 생각한다. 이 작품은 일제 강점기에 위인부였던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조사하는 과정을 소설로 썼다. 문제는 피해자들의 증언 녹취에 구체적인 언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정확한 기록을 위해 증언을 녹음했다. 녹화된 테이프의 재생시간은 60분이지만 그 시간 내내 녹음이 되어 있는 말은 인터뷰를 하러 간 사람의 말이 대부분이고 정작 피해자의 말은 없다. 침묵을 녹음했을 뿐이다. 자신의 말을 지우고 싶지만 “그럼 내 목소리와 함께 녹음된 그녀의 침묵도 지워지니까, 내 말보다 그녀의 침묵이 중요하니까, 그녀의 침묵은 발화되지 못한 말이기도 하니까.”(9쪽) 지울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의 시간관념에선 일제강점기가 과거의 일이지만 소설 속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현재는 여전히 과거의 고통이 머물러 있다. 『듣기 시간』은 작은 숨소리조차도 이야기로 엮어내는 작가
[용인신문] “얼마나 힘들어야 웃음으로 고통을 포장하게 될까”(208쪽) 10대의 이야기 이지만 지금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올해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을 받은 이 작품은 가족이라는 이야기를 드라마처럼 펼쳐놓는다. 등장인물은 자신의 트라우마 때문에 가족에게 더욱 집착하기도 하고, 반대로 그것 때문에 가족과 철저하게 거리두기를 하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마찬가지다. 곪은 상처는 걷어내야 새 살이 나듯이 과거의 사건과 감정으로부터 얽힌 상처들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내 결국 맺힌 감정의 응어리들을 훌훌 풀어내고 단단한 딱지를 만들어낸다. 이제 곧 새 살을 약속하는 딱지이다. 청소년소설에서 가족을 주제로 하는 이야기는 흔한 편인데 『훌훌』은 소재 면에서 독특하다. 소설은 주인공 유리의 복잡한 상황을 시종일관 긴장감을 유지하며 끝까지 끌고 가는 힘이 있다. 다소 신파적인 할아버지의 상황을 개성 있게 만드는 건 할아버지의 단순 명료한 대사 때문이다. 유리가 서정희씨라고 부르는 엄마의 생애를 ‘나쁜 사람’으로 일갈하지 않는 작가의 마무리도 훌륭하다. 진지함과 가벼움을 넘나드는 고등학생들의 묘사도 치밀하다. 단숨에 읽히는
[용인신문] 일제강점기가 끝난지 오래지만 여전히 친일청산이 문제인 상황에서 어김없이 3·1절이 돌아왔다. 폭력의 세기를 살던 과거의 인물들은 날카로운 역사의 평가 위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고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가족을 지키기 위해 배신을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지만 그러한 딜레마가 우리 앞에 닥친다면 우리는 다른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일제강점기의 만행을 목격한 입장에서 스텔라의 딜레마를 가볍게 보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과거에 있기때문이기도 하다. 『스텔라』는 과거 독일과 유대인 사이에 있었던 불행한 일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 재판과 연이들의 사랑이야기와 독일과 유대인 사이에 벌어졌던 사건들이 사슬처럼 엮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 이 작품은 우리 정서에도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다. 게다가 이 이야기가 먼 나라에서 그것도 과거의 일인데도 지금 우리에게 유효한 까닭은 여전히 어떤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차선이 없는 상태에서의 선택 말이다. 스텔라는 무엇보다 외로웠다고 고백한다. 선택은 지독히도 개인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전개방식도 독특하다. 보통의 다른 소설처럼 연애 이야기가 소개된다. 1942년 일어난 사건이 뼈대를
[용인신문] 필자 노리나 허츠는 화려한 이력을 가진 필자이다. 그가 다닌 학교, 재직했던 회사, 연단이나 저술 등을 보면 경제 석학이라 불려도 무리가 없을 만큼 화려하다. 책날개에서 『고립의 시대』는 “21세기에 만연한 외로움과 그 사회적 비용을 밀도 있게 분석한 책”으로 소개된다. 필자는 21세기 외로움의 위기가 코로나19가 유행하기 훨씬 이전인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외로움의 근본적 원인이 자유를 가장 우선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때문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고립된 생쥐가 친구들을 잔인하게 공격하는 것처럼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외로운 개인은 경제적으로 소외되고 정치적으로 극단적으로 흐를 경향이 있음을 경고한다. 대개 코로나19 사태로 외로움이 극대화되었다고 하지만 필자는 잘못된 시각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정부가 개인의 건강한 삶에 관심을 가지고 사태에 적극 개입하기 때문에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대안 역시 이와 맥을 같이한다. ‘보이지 않는 손’을 말했던 애덤 스미스조차도 공동체와 다원주의가 중요하다고 말한 것처럼 협력적 자본주의 시대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이다. 신자유주의가 평등과 온정의 관계를 거래의 관계로 바꿨다면 기업과 금융권의 정서가
[용인신문] 어떤 이는 노인이라는 말을 슬픈 단어라고 생각하지만 주인공 카퓌신은 다르게 생각한다. 소설은 카퓌신이 고등학생 신분으로 벨레르 요양원에서 인턴을 하는 기간 동안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작품은 두 가지 면에서 따뜻한 이야기다. 하나는 요양원에 있는 노인들의 갈등과 해소를 관찰하는 데 있다. 대체로 우리 사회에서 요양원에 간다는 사실은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인다. 나이 들며 잃어가는 기억만큼이나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지위를 잃은 노인들의 이야기는 어쩐지 국가를 뛰어넘는 서글픔이 전해진다. 하지만 노인들에게도 생에 대한 기쁨과 욕망이 있으며, 나름의 행복을 찾거나 나름의 삶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살며시 미소가 피어오르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고등학생 카퓌신과 요양사들이 살아내는 치열함과 배려에서 생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 요양원에 있는 노인들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라는 요양사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카퓌신은 생각보다 가까이 어른들에게 다가간다. 카퓌신은 자신의 가발 속에 숨겼던 아픈 기억들을 인턴과정을 수행하면서 소화해 내고 삶의 부분으로 받아들인다. 프랑스에서 청소년을 위해 쓴 저작물들에서 관찰되는 것은 이들의
[용인신문] 소설은 허구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나경의 소설집 『극히 드문 개들만이』를 보면 어쩐지 뉴스에서 비어져 나온 현실의 한 조각처럼 생생한 이야기들이 보인다. 현실의 문제를 재조명해 보려 하는 작가의 고민이 아직 농익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더 이상의 상상이 어려운 것일까? 냉장고에 코끼리를 넣는 방법을 농담처럼 주고받던 일상의 언어에 폭력이 가담하면 소시민들의 세계는 무너진다. 그 폭력의 원인은 언뜻 보면 지독하게 개인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수파」를 보면 소시민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건 다수파를 표방하는 어떤 리더들의 보이지 않는 손일지도 모르겠다. 「극히 드문 개들만이」 문제를 알아차린다. 반복되는 부조리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아는 것은 ‘극히 드문’ 어떤 이들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끊을 수 있는 용기와 힘을 가진 것도 소시민이다. 그러나 어떤 유령같은 소시민은 실체를 알아도 유령이기 때문에 현실에 개입할 수 없다. 죽음의 ‘냄새’를 찾아가는 주인공도 등장한다. 유령이 된 소시민에게 ‘누나’와 같은 결단을 할 수 있을까? 독자들은 진지하게 고민하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이처럼 이나경의 첫 소설집 『극히 드문 개들만이』기 소설
[용인신문] ‘38따라지’라며 스스로를 낮춰 칭하는 채남희의 면면을 살펴보면 결코 낮은 사람이 아니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 ‘시’라는 것을 자신의 새로운 인생으로 맞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 안에 자신의 삶을 투명하게 늘어놓기 때문이다. 그의 첫 작품집 『제진역』은 그의 그리움이 면면히 녹아있다. 철도는 제진역에서 멈췄고 고향에 갈 수 없다. 독자가 『제진역』에 마음이 가는 이유는 우리 모두의 염원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철 따라 길 따라』 역시 첫 번째 마음을 이어간다. 시인은 은퇴 후의 삶을 즐길만한 연배임에도 자신의 존재 이유를 고민한다. “오늘도/ 존재 이유를 찾다가/ 어느새/ 해는 지고” (「존재 이유」, 부분) 언어를 꾸미고 에둘러대기보다 투박하지만 오롯이 담아내는 감정이 담백하다. 돈키호테처럼 시의 말을 타겠다는 당찬 포부도 멋지다. 그는 남북을 연결하는 철도를 만들기위해 남북을 오갔던 일들 속에 발견한 순간들을 포착해 시에 적기도 했다. 날 선 북한사람들의 얼굴이 시에 등장해 여전한 긴장을 드러내기도 한다. 삶이라는 길 위에 겸손한 그는 여전히 한 인간으로 존재 이유를 묻는다. 다섯 번째 저술이자 시를 품은 에세이집 『다릿발』은
[용인신문] “무언가가 부서지면 그게 누구 것이건 간에 전부 자기 탓이라고 생각”(372쪽)하는 인물이 이 있다. 그 인물은 아이일 뿐이지만 부모가 사람들이 미워하는 존재인 탓에 버려졌고 트라우마가 생겨 악몽을 꾸고, 그로 인해 또 다른 문제들을 일으켰다. 문제만 보는 마을 사람들은 인물을 격리하고 외면한다. 그저 아이들일 뿐인데도 말이다. 벼랑 위의 집에 사는 아이들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라이너스, 그는 직장에서 소속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고, 자신의 집에서조차 편안하지 못했다. 감시를 목적으로 파견되어 간 벼랑 끝의 집. 그곳은 벼랑 끝에 서는 것처럼 더 이상 갈 곳 없는 아이들이 편안하게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지낼 수 있는 곳이었다. 아이들의 진짜 모습을 보고 당황스러운 라이너스에게 아서는 “집이란 그 어디보다도 자기 자신이 되는 곳이지”(163쪽)라고 말한다. 이 작품은 루시와 같은 아이들 여섯을 돌보는 아서 파르나서스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소수자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라이너스의 행보를 따르다보면 ‘나’의 발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마법적 존재의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