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80 이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아요 세사르 바예호 “이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아요”라고 너는 내게 말한다. “다 가버렸어요. 응접실, 침실, 정원에는 인적이 없습니다. 모두가 떠나버려서 아무도 없지요.” 나는 네게 이렇게 말한다. 누가 떠나버리면, 누군가가 남게 마련이라고. 한 사람이 지나간 자리는 이제 아무도 없는 곳이 아니라고. 그저 없는 것처럼 있을 뿐이며,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곳에는 인간의 고독이 있는 것이라고. 새로 지은 집들은 옛날에 지은 집보다 더 죽어 있는 법. 담은 돌이나 강철로 된 것이지 인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집을 짓는다고 그 집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집에 사람이 살 때에야 비로소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집이란, 무덤처럼,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이기 때문이지. 이것이 바로 집과 무덤이 너무너무 똑같은 점이지. 단, 집은 인간의 삶으로 영양을 취하는 데 반해서, 무덤은 인간의 죽음으로 영양을 취한다는 게 다른 거다. 그래서, 집이 서 있고, 무덤은 누워 있는 법. 모두들 집에서 떠났다는 것은 실은 모두들 그 집에 있다는 것. 그렇다고 그들의 추억이 그 집에 남은 게 아니라, 그들 자신이 그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79 물속의 방 송재학 저수지마다 물의 방이 있지는 않지만, 내 왼쪽 저수지는 고요했기에 매년 사람이 빠졌다 물의 낭떠러지에 물의 방이 있어야만 했다 얼음장이 움푹 꺼질 때의 탄식만을 본다면 물의 방은 수심이 그은 금의 내부이다 언젠가 얼어버릴 물의 시퍼런 능선이 가시를 내밀었던 자국까지이다 물의 뼈는 수은 같은 금속이라 단단하고 자유롭다 그러니까 물고기는 물과 수은을 닮아 푸른 등뼈를 만들었다 물의 방에도 비늘과 아가미가 있어 물고기와 비슷하다 물풀처럼 일렁이는 이야기는 부레 없이 지느러미 각주를 달고 물의 시렁에 뼈만 추스려 얹었다 가끔 죽은 뼈가 닿으면 물의 속눈썹부터 손사래를 쳤다 내 안에 부릅뜬 사람이 있듯 물의 어두운 곳에 물의 영혼이 있다 물의 침전물이 고스란히 간직되듯 내 안의 사람은 다시 나를 느낀다 수면의 악다구니와 달리 물의 방은 어제 가위 눌린 눈물이 필사되는 곳이다 물이 일일이 울고 있다 --------------------------------------------------- 송재학 시인이 들려주는 ‘물속의 방’. 모든 “저수지마다 물의 방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의 방은 반드시 있어야 하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78 3분 동안 최정례 3분 동안 못할 일이 뭐야 기습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지 다리가 끊어지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한 나라를 이룰 수도 있지 그런데 이봐 먼지 낀 베란다에 널린 양말들, 바지와 잠바들 접힌 채 말라가는 수치와 망각들 뭐하는 거야 저것 봐 날아가는 돌 겨드랑이에서 재빨리 펼쳐드는 날개를 저 날개 접히기 전에 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지 도장을 찍고 악수를 청하고 한 나라를 이루어야지 비행기가 떨어지고 강물이 갇히기 전에 식탁 위에 모래가 켜로 앉기 전에 찬장 밑에 잠든 바퀴벌레도 깨워야지 서둘러 겨드랑이에 새파란 날개를 달아야지 ----------------------------------------------------------------------------- 시공간을 넘나드는 분방한 상상력과 독특한 화법으로 개성적인 시 세계를 펼쳐온 최정례 시인의 시입니다. 3분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시인은 말합니다. “기습 결혼을 하고/아이를 낳을 수 있지/다리가 끊어지고/백화점이 무너지고/한 나라를 이룰 수도 있”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왜 일상의 과제들을 마치는 데는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
용인신문 시로 쓰는 편지 77 사랑법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 만약 사랑을 완성하는 방법이 있다면, 모두 귀를 기울이지 않을까요. 여기 시인이 들려주는 ‘사랑법’이 있습니다. 묵독도 좋지만 낭독이 더 알맞은 시편이지요. 대상이 원하는 것을 존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답니다.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침묵할 것.” 어쩌면 존중 이후의 침묵이 곧 사랑의 완성인지도 모르겠군요. 꽃과 하늘과 죽음에 대해 침묵의 언어로 소통하는 일은 경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너무 쉽게 꿈꾸고, 쉽게 흐르고,
용인신문-시로 쓰는 편지 76 반송 주영헌 창밖 전화선에 가만히 손을 올려 실을 뜨다 찌릿한 느낌에 손가락을 들여다본다. 회오리치는 지문 속으로 누군가가 보낸 감정이 누전된 것만 같다. 실뜨기를 해 본 사람만이 손과 실의 연결을 이해한다. 실뜨기란, 허튼 고백이 아니라면 만날 수 없는 두 손으로 줄의 긴장감을 이어가는 일 혹은 마음에 새길 다음의 무늬를 짐작하는 일 실의 가닥에서 당신의 감촉을 기억한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맥박(脈搏) 느껴지지도 않은 작은 감정에 설레어 본 적이 있었던가. 전송하지 못하고 면도날처럼 입안에서 맴돌던 몇 줄의 모호한 문장과 눈(目) 속에서 무음으로 잠기던 그대의 뒷모습, 긴 머리카락 생각해보면 모호한 감정의 발신은 잊을 만큼 반송이 늦고, 단호한 몇 개의 단어는 긴 문장을 갈음한다. --------------------------------------------------- 오늘의 시는 ‘마음들’의 이야기. 시인은 우리에게 마음과 마음의 연결지점에 대해 들려주고 있습니다. ‘누군가 보낸 감정’을 ‘누군가 받는 것’. 안타깝지만 ‘시차’를 두고 도착한 마음은 이미 ‘희미하게 느껴지는 맥박’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가하면 ‘전
용인신문-시로 쓰는 편지 75 밀물 김어영 손녀가 할아버지 등에 손가락으로 쓴다 보리 싹 같은 감촉 재미있다는 듯 깊이도 쓴다 할아버지의 등에 혼미가 찾아온다 각질이 무디어진 탓일까 염전의 갈라진 등을 태양이 잠식하고 있다 지난여름 모래 위에 쓰고 지우던 어지러운 마음, 밀물이 가져갔는지 깨끗하다 그새 일 년이 가버렸구나 눈 감으면 가슴에 파도가 밀려온다 -------------------------------------------------------------------- 김어영 시인은 ‘기억의 연금술사’인 것 같습니다.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옵니다. 그 기억의 풍경을 펼치면, 손녀와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지요. 손녀는 할아버지 등에 무슨 문장을 남기고 싶은 걸까요. 문장보다 중요한 것은 ‘보리 싹 같은 감촉’일 것. 손끝에서 묻어나올 것 같은 보리향이 풍경을 가득 채웁니다. 일순 환해지는 풍경이란 이런 시공간을 가리키는 것이겠지요. 할아버지께서 손녀의 문장을 읽어내지 못하시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보리 싹 같은 감촉’을 느끼셨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겠지요. 문득, 우리는 지난여름 수없이 썼다 지워버린 마음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 어지러운
용인신문-시로 쓰는 편지 74 걸음 차성환 걸음은 걸으면서 걸음마다 피는 꽃들과 녹아내리는 얼음을 생각하고 방향이 없이 방황하는 걸음은 구두 뒤축처럼 딱딱하게 굳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른 걸음이 올 것 같은 골목에 서서 걸음 속에 걸음이 왼발과 오른발이 번갈아 움직이면서 엉덩이와 어깨가 춤추듯이 흔들리는 길을 따라 흘러가는 걸음의 리듬을 기다리는데 나는 걸음을 가두는 걸음에 갇힌 채 걷지도 못하고 바다로도 가고 싶은 걸음이 산에도 못가고 집에도 못가고 걸음을 포기하고 걸음으로 남아 어디에도 가지 못하는 걸음을 자책하며 눈물을 흘리고 걸음이 흘러내리고 녹아내리고 바닥에 스며 새로운 걸음을 완성할 때까지 또 다른 걸음을 꿈꾸는데 계단을 오르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걸음을 따라 걸으면 죽은 걸음이 온통 가득 넘쳐 출렁이는 걸음의 파도 걸음의 슬픔 걸음의 얼음 걸음의 덧없음 걸음의 넘어짐 움직이지 못하는 걸음 그대로 압정으로 벽에 꽂아 걸음을 걸어놓고 걸음걸이를 감상하고 그러고 보면 걸음은 걸음을 멈출 때 가장 걸음에 가깝고 걸음은 내 시의 거름이 되어 치사하게 머릿속에 얼어붙은 걸음으로 시를 쓰고 나를 여기서 저기로 옮겨주는 걸음은 문이 없는 걸음으로 걸음을 끝내려
용인신문-시로 쓰는 편지 73 단풍주의구간 안영선 풍경은 말의 재단사였을지도 몰라 (단풍주의구간입니다 주의 운전하시기 바랍니다) 내비게이션의 낭랑한 소리가 들렸지 알록달록 물든 단풍이 골짜기를 품고 있었어 하늘은 온통 바다 빛으로 채색된 날이었을 거야 말은 저속으로만 풍경을 즐기는 시간을 허락했어 아내는 모든 말이 단풍처럼 선홍색이거나 노란색이었으면 좋겠다고 했지 풍경은 차창에 가까워질 때마다 선명한 말을 쏟아냈어 저 앞선 곳 고라니 한 마리 풍경에 갇혀 쓰러져 있었지 (야생동물출몰지역입니다 주의 운전하시기 바랍니다) 붉게 물든 풍경은 가끔 말을 놓치기도 하나 봐 말을 놓친 풍경이 도로 위에서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지 단풍주의구간 아내에게서 처음 들어본 말이야 두근대는 아내의 속내를 귀가 먼저 읽어낸 말이지 도로표지판에 없는 말 인터넷에 검색되지 않는 말 풍경이 꼭꼭 숨겨두었다 이 계절에만 끄집어내는 말이었지 아내는 시월이면 단풍주의구간을 달리고 싶어 했어 풍경이 전하는 말을 듣고 싶어 했지 ----------------------------------------------------------------------------- 처서가 지나고, 이제 초록들은
유명무실한 송탄상수원 보호구역으로 36년 간 피해를 받아온 용인시민들이 평택시의 이기적 행정을 규탄하는 실력행사에 나섰다. 지난달 30일 정찬민 시장을 비롯한 지역정치권과 주민 800여명이 평택시청 앞에서 송탄상수원 보호구역 해제를 촉구하는 모습. 정 시장은 이날 상수원보호구역 해제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며 강한 의지를 밝혔다.
용인신문-시로 쓰는 편지 72 통영 ―책 이은봉 무엇인들 책이 아니랴 오랜만에 들린 통영에서도 보고 배울 책은 많았다 구중서 선생님과 통영에 놀러가서는 먼저 박구경 시인이 소개한 ‘호두나무실비집’이라는 책부터 읽었다 정가 2만 5천 원인 이 책의 주요 내용은 맛있는 음식을 과식하지 않고 먹는 법이었다 빠른 리듬에 쫓기다 보니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참 지난 뒤에야 겨우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식욕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일까 배가 불러 힘들어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김덕우 시인이 소개한 또 한 권의 책을 읽게 되었다 ‘한산 호텔 부속 횟집’이라는 책이 그것이었다 이 책에는 첫 페이지부터 과식은 당뇨병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씌어 있었다 책의 내용은 어렵지 않았지만 책의 내용대로 살기는 어려웠다 책을 읽고 있으면서도 책의 내용을 지키지 못한 셈이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달라 통영에서도 내내 괴로웠다 끝내는 배탈이 나서 설사를 하고 말았다 책을 읽고 있으면서도 책의 내용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내 오랜 병통, 통영에서는 이제 더 이상 책을 읽지 않기로 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용인신문-시로 쓰는 편지 71 처서(處暑)라는 말의 내부 천서봉 골 진 알밤, 무딘 칼날 세워 보늬 긁는다. 겨의 주름 깊이 길이 나 있다. 더위가 물러가는 길, 길을 따라 또 길이 돌아오는 길. 죽은 할미도 달의 오래된 우물도 모두 내 안구 속으로 돌아와 박힌다. 깊어가는 수심의 습지에서 남보다 더 오래 우는 개구리의 턱이 깊다. 지나간 애인들의 뒤통수가 전봇대마다 건들건들 매달려 있다. 울음소리를 참아온 나무들이 투명한 손바닥을 여름의 뒷등에 비빈다. 앵앵거리는 추억은 다만 비틀어져갈 뿐, 하나도 안 아프다. 그런 모기의 주둥이처럼 저녁이 오고, 한두 겹의 내력을 더 견디며 나는, 고요의 중심으로 천천히 내려가리라. 더위가 물러가는 길, 파르라니 깎은 몇 개의 알밤을 바가지에 담그면 달의 손바닥들이 내 오래된 뇌(腦)를 쓰다듬는다. 서늘한 나의 카르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처서(處暑)는 여름 더위가 그치는 날. 입추와 백로 사이의 절기이지요. ‘처서가 지나면 풀도 울고 지나간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시에
▲ 유리섬미술관 대부도에 위치한 유리섬미술관에서는 문화체육관광부와 (재)예술경영지원센터 후원으로 '문화가 있는 날' 연계프로그램 '속속이야기 - 유리 숲 속 이야기, 유리 속 이야기'를 8월 15일부터 내년 1월 30일까지 운영한다. 속속이야기는유리 숲속이야기란 부제목으로 총 5회의 A프로그램과 유리 속 이야기란 B프로그램으로 나눠 진행한다. ◎ A 프로그램 유리 숲 속 이야기 - 참가인원 : 매 회당 8명의 학생과 학생 가족을 포함한 약 24~35명 - 기 간 : 2015. 8. 15. 토요일 ~ 2016. 1. 30. 토요일 (매달 마지막주 수요일) - 시 간 : 오전 10:00~12:00 (매회당 120분) - 횟 수 : 총 5 회 (학생 40 名) - 내 용 : 유리 숲 속 이야기란 공모주제로 채택된 그림 총 40점(매회당 8점)을 수거해 현대유리조형작가가 직접 각 학생들의 그림을 근거로 유리작품을 완성한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유리조형작가는 자신의 작품 제작기법과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 학생의 그림을 선택해 그림 속 이야기를 유리작품으로 재현해서 완성시킨다. 이렇게 최종 채택된 학생의 그림(총 40점)은 제작된 작품과 함께 유리섬 미술관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