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두고 가라ㅣ박덕규

  • 등록 2020.03.30 09: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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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두고 가라

                                   박덕규

 

내 팔짱 끼지 마.

네 눈을 내가 보고 있다고 믿지 마.

네가 가리키는 저 언덕으로

함께 갈 거라 착각하지 마.

 

휘날리는 깃발 따라

여린 신발들 몰려간 뒤 그

자욱한 연기 속에 내가 남은 거야.

나는 몸통이야.

 

눈 내리는 정거장에서

막차를 기다리던 항아리가 아니야.

긴 그림자를 늘여놓고

허공을 유혹하던 그런 노래가 아니야.

 

폭풍에 쓸린 등뼈를 하얗게 드러내고

땅 밑을 흐르는 먼 소리를 들으며

나 여기 있어.

날 두고 가라.

 

박덕규는 1980년 『시운동』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시인의 길에 들어섰고,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었으며, 1994년 계간 『상상』으로 소설가가 되었다.

그는 전방위 문학인이다. 시, 소설, 동시, 동화, 수필, 평론, 오페라 극본, 뮤지컬 극본, 시극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창작활동을 해왔다.

「날 두고 가라」는 명령문으로 된 선언이어서 비장미가 넘친다. 내가 네 눈을 보고 있다고 믿지 말라고, 네가 가리키는 저 언덕으로 함께 갈 거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선언한다. 다음 연의 비의는 '여린 신발'이다. 깃발 따라 간 여린 신발은, 정치적 함의를 유추하게 한다. 그렇게 여린 신발들이 몰려간 다음 자욱한 연기 속에 남는 거라고, ‘나는 몸통’이라고 선언한다. 내가 역사의 주체인 것이다. 나는 ‘눈 내리는 정거장에서/ 막차를 기다리던 항아리가 아니’라고, 허공을 유혹하던 그런 노래가 아니라고 선언한다. 막차를 기다리던 항아리는 유골항아리로 읽힌다. 마지막 연은 이 시의 절정으로 ‘땅 밑을 흐르는 먼 소리를’ 듣는 화자는 죽은 자다. 그러기에 ‘나 여기 있’다고, ‘날 두고 가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단호하고 무거운 시다. <곰곰나루> 간 『날 두고 가라』중에서. 김윤배/시인

김윤배 기자 poet01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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