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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승만대통령이 독재자로 군림하고, 친일파들이 득세하자 부패한 정권과 싸울 것을 다짐하고 정계에 뛰어들었다. 1957년엔 카톨릭 영세(영세명 토마스 모어)를 받았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세번연속 떨어지는 등 정치는 그에게 숱한 좌절과 시련을 안겨주었다. 1961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민의원에 당선됐지만 당선 3일만에 5.16쿠테타가 일어나 의미가 없어졌다. 이 암울한 시기에 평생 반려자인 이희호 여사를 만났다. 1963년에 목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눈부신 의정활동을 이어갔다.
# 네 번의 죽을 고비
그는 네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다. 6.25전쟁때 공산군에 붙잡혀 총살직전에 탈출했고, 1971년엔 8대 국회의원 선거 때 지원유세를 가다 교통사고를 가장한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1973년엔 일본 도쿄에서 중앙정보부원들에게 납치당해 바다에 던져지기 직전 극적으로 생환하였고,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 이렇듯 늘 죽음의 위험이 그를 따라다녔지만 민주화와 인권, 평화통일의 길을 선택한 그는 한국 민주화의 상징이 되었고 ‘아시아의 만델라’라는 이름까지 얻게 되었다.
# 한국민주화의 상징
연금과 투옥 등 계속된 박해속에서도 그의 손에선 역사, 철학, 경제, 문학서적 등 책을 통해 마음의 평정을 찾곤 했다. 80년 사형선고를 받고 가족에게 보낸 ‘옥중서신’,’대중경제론’,’3단계통일론’,’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등의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수차례 노벨평화상 후보로 이름을 올렸고 아드레이 사하로프, 레흐 바웬사와 함께 세계 3대 인권수호자로 알려지게 됐다. 곧 그는 한국 민주화의 상징이었고 한국의 민주화는 그와 함께 전진했다.
# 대통령 김대중
7대, 13대, 14대 대선에서 낙선한 그는 1997년 마침내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건국이후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게 된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한국은 사상초유의 외환위기로 국가부도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이에 그는 관치경제에 대수술을 감행, 금융·기업·노동·공공 4대 분야에 일대 개혁을 단행했고, 2001년 8월 예상보다 3년을 앞당겨 IMF차입금을 전액 상환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민주화운동보상법, 의문사진상규명법,국가인권위원회법 등 각종 민주화 입법을 추진했다.
# 통일 위한 발자국
2000년 6월 분단 55년만에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 냈다. 그의 햇볕정책은 남과 북의 갈등을 녹여 한반도에 화해와 협력, 평화의 싹을 움트게 했다.이어 그해 12월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한국과 미얀마, 동티모르 등 아시아 민주화와 인권신장에 기여하고 남북화해정책을 펼친 공로가 수상 이유였다.
2003년 대통령직을 물러나 그가 진정으로 불렀던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속으로 돌아왔다.
돌아보면 그의 인생자체가 파란만장한 세월이었지만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꿈꾸었던 그의 노력은 역사에 생생히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