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에서부터

  • 등록 2009.06.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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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부터

먼 곳에서부터

김 수 영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조용한 봄에서부터
조용한 봄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여자에게서부터
여자에게로

능금꽃으로부터
능금꽃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아프다

(1961. 9. 30)




이 시는 김수영 시편 중에서 가장 난해하게 읽히는 시 중의 하나다. 이 시의 비의는 ‘다시’라는 부사와 시가 쓰여진 날짜다. 부사 ‘다시’는 ‘하다가 그친 것을 계속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아픈 몸은 전에 아팠던 몸이며 전에 겪었던 역사적 사건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역사적 사건이라고 못 박는 이유는 이 시의 창작 시기 때문이다. 4. 19 혁명은 군부 쿠테타로 실패로 돌아가고 이에 절망한 김수영은 레드컴플렉스로 인해 잠행하면서 「신귀거래사」연작 속으로 문학적 망명을 한다.

「먼 곳에서부터」는 김수영이 문학적 망명을 청산하면서 쓴 첫 작품이다. 역사를 잉태하기 위해서 아팠던 몸이 다시 아프기 시작한다면 새로운 역사를 잉태하기 위한 전조이다. 몸이 아프다는 것은 수태 가능한 상태의 몸 하는 몸이 분명하다. 몸을 하고 난 몸이어야 비로소 새 생명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몸이, 아니 우리들의 역사의 몸이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움직여가며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역사의 몸은 “조용한 봄에서부터/조용한 봄으로”온다. 조용한 봄에서 조용한 봄으로의 이행은 시간의 이동이며 순환이다. 이는 우주적 시간의 운산이며 보이지 않는 먼 곳에서 일어나는 민중적 에너지의 원형 운동인 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김수영이 말하고자 하는 ‘새 생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새 생명은 좀더 확실하게 회임 가능한 여자에게로 실체적인 몸을 만난다. 새 생명은 모든 모성에게로 가서 얹히게 되고 “능금꽃으로부터/능금꽃으로.....” 활짝 피어나는 것이다. 민중의 역사는 민중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 지향성을 가지고 흘러가면서 거대한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실체이며 또한 교훈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몸이 아프다”고 고백한 김수영은 60년대에 이미 우리들의 현대사가 어디로 흘러가게 될지를 예감했던 것이다. 우리들의 슬픔과 눈물까지도 미리 보았는지 모를 일이다.

김수영은 한국 시단의 문제적 인물로 1921. 11. 27 서울 종로구 종로 2가 158번지에서 태어나 1968. 6. 16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들에게 「풀」이라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시인이지만 그밖에도 『사랑의 변주곡』『거대한 뿌리』『설사의 알리바이』등 문학사를 빛낸 작품들로 이름에 값한다. (김윤배/시인)




* 김윤배 시인은 1944년 충북 청주 출생으로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석사와 인하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를 받았으며, 현재 용인에 살고 있다.1986년『세계의 문학』을 통해 시단에 나왔고, 2006년 제2회 자랑스런 경기인대상(교육직 공무원부문)을 수상했다. 화성시 교육장으로 명예퇴임한 김 시인은 현재 고려대학교 문예창작대학원 등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 『겨울 숲에서』(1986년, 열음사), 『떠돌이의 노래』(1990년, 창작과비평사, 『강 깊은 당신 편지』(1991년, 문학과지성사), 『굴욕은 아름답다』(1994, 문학과지성사),『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2006년, 문학과지성사) 등이 있다. 김 시인은 앞으로 1년 여간 본지에 감동이 넘치는 주옥 같은 시편들을 뽑아 해설까지 곁들여 연재할 예정이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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