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칼럼/아버지의 눈물과 어머니의 웃음

  • 등록 2009.06.01 00:00:00
크게보기

이향란(시인)

1.
나의 아버지는 광부였다. 한때는 우리나라 최대의 철 생산지였던 강원도 양양군 장승리. 지금은 폐광지로 남아있는 이곳에서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우연한 기회에 지인의 소개로 광부 일을 하시게 되었는데 임무는 감독직으로 일반 광원들의 현장업무 파악을 위해 늘 갱내를 드나들면서 상황을 지시하거나 체크해야만 했다.
나는 오랫동안 아버지의 일이라는 것이 그저 한 가정의 생계수단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쯤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자주 들리는 사고소식과 함께 어머니의 한숨소리가 깊어질 즈음에야 아버지의 일이 생명을 담보로 할 만큼 위험한 일임을 깨달았다.
급기야 어느 일요일 아침, 어머니는 솥에 안치려던 소쿠리의 흰쌀을 맥없이 쏟고는 부엌 바닥에 주저앉으셨다. 옆집 아주머니가 전해준 비보는 갱 속에서 인사사고가 났는데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소관이라는 것.
그날 저녁 아버지는 초췌한 모습으로 귀가하셨고 그 다음날 나는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지금껏 잊혀 지지 않는 광경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언제나 과묵하시고 인자하시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면모가 너무 좋아서 아버지 같은 남자랑 결혼할 거라며 발을 씻겨드리던 둘째 딸을 유독 귀여워해주시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어머니의 품안에서 소리 없이 울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그 후 아버지는 다시 출근을 하셨고 그때 그 일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그날 나는 깨달았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산 같은 존재이기도 하지만 지어미 품에서 울기도 하는 나약한 남자이기도 하다는 아주 인간적인 사실을.

2.
어머니는 평생을 거의 월남치마만 입고 사셨다. 어릴 때 외삼촌이 태워준 자전거의 뒷바퀴에 발이 끼는 바람에 오른발 복숭아 뼈에 치명타를 입으셨는데 그 상처를 남에게 보이기 싫었던 것. 어머니는 한 여름에도 땀을 흘리시며 긴 치마 속에 상처를 감추셨다.
뭐 어떠시냐, 당당히 상처를 보이며 편하게 사시라고 자식들은 권했지만 당신뿐만 아니라 자식들에게도 좋지 않다며 끝끝내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간혹 푹푹 찌는 더위를 못 이겨 치마를 살짝 걷어 올리실 때마다 드러나던 가늘고 흰 다리. 햇빛을 못 본 탓이었다.
평생을 그렇게 가슴앓이 하시던 어머니를 위해 나는 언론사에 근무하던 시절 잘 알고 지내던 정형외과 의사를 소개해 드렸다. 그 후 어머니는 살이 깎여 나간 부위에 철심을 박고 당당한 걸음걸이를 되찾을 수 있었다.
월남치마를 외면하고 무릎이 드러나는 치마도 입으셨다. 서너 해 전에는 칠순을 맞이하셨지만 아버지와 함께 노인대학에서 포크댄스며 시조낭송, 하다못해 연극까지 배우시며 즐거운 노후를 보내시고 계신다. 오랜 상처를 버리고 웃음을 되찾으셨다.

‘가정의 달’이라던 5월이 다 지나갔다. 가정은 가장 작은 공동체이며 사랑의 보금자리이다.
부모와 자식으로 이루어진 그 공동체 속에도 별의별 일이 다 찾아온다. 기쁨과 슬픔, 상처와 치유가 교차한다. 그러면서 더욱 결속력 있는 가정을 이루게 된다. 얼마 전 전직 대통령의 서거로 대다수의 국민이 충격과 슬픔을 겪었다.
우리 모두 가족공동체처럼 대통령의 눈물을 발견하고 대통령의 상처를 치유하려 했다면 눈부신 신록의 계절에, 가정의 달이라는 5월에 국가공동체의 전직 지도자를 자살로 모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용인신문 기자 webmaster@yonginnews.com
Copyright @2009 용인신문사 Corp.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용인신문ⓒ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지삼로 590번길(CMC빌딩 307호)
사업자등록번호 : 135-81-21348 | 등록일자 : 1992년 12월 3일
발행인/편집인 : 김종경 | 대표전화 : 031-336-3133 | 팩스 : 031-336-3132
등록번호:경기,아51360 | 등록연월일:2016년 2월 12일 | 제호:용인신문
청소년보호책임자:박기현 | ISSN : 2636-0152
Copyright ⓒ 2009 용인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mail to yonginnews@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