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 동결 시대, 미래를 위한 보험

  • 등록 2025.12.15 09:5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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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태비뇨의학과의원대표원장(연세대의대졸업·전대한생식의학회회장·전제일병원병원장)

 

용인신문 |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요즘은 더하다. 결혼은 선택의 문제가 되었고, 연애는 피곤한 감정노동으로 여겨지며, 출산은 ‘권장’이 아니라 ‘부담’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다. 남성 난임·불임을 전공한 필자의 병원에는 오늘도 정자를 찾으러 온 남성(폐쇄성&비폐쇄성무정자증)들이 줄지어 들어오는데, 신기하게도 그들의 표정과 대답은 하나로 귀결된다. “왜 진즉 생식기능에 문제가 생길 걸 몰랐을까요?”

 

고환에서 정자 생산이 제대로 안 된다거나(비폐쇄성무정자증), 정자는 만들어지는데 정자가 배출이 안 된다거나(폐쇄성무정자증), 정자 수가 너무 적다거나(희소정자증) 등을 조금만 빨리 알았더라면 빨리 치료하거나 문제 해결에 적극적이었을 터인데, 모르고 지낸 시간이 문제를 키운 셈이다.

 

간혹 ‘나는 평생 자식을 안 낳을 거다’라고 호기롭게 말하는 남성들도 있다. 인생을 조금 더 살아본 선배의 입장에서 조용히 알려주고 싶은 진실이 있다. 오늘의 마음이 내일의 마음이 될 가능성은 생각보다 낮다는 것이다. 우리는 밥맛도 하루가 다르고, 가고 싶은 여행지도 그해 그해 달라지는데, 하물며 인생 최대의 선택인 출산에 관한 마음이 영원히 그대로일 리는 없다.

 

그리고 더 큰 착각이 하나 있다. 문지방 넘을 힘만 있어도 아내에게 임신을 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착각이다. 남성도 40대 중반이 넘으면 정자 수는 줄고, 운동성은 떨어지고, DNA도 손상이 된다. 겉모습은 여전히 젊고 건강해 보일지 몰라도, 생식세포만큼은 정직하게 나이를 먹기 때문이다.

 

필자가 한 가지 방법을 알려주자면, 결혼을 접어두고서라도 가까운 비뇨기과에 가서 자신의 정자 상태를 검사해 보고, 필요하다면 정자를 동결 보존해두는 방법을 고려할 만하다.

 

정자는 약 50~60μm(마이크로미터)로 난자(직경 약 120μm)의 1/25 수준밖에 안 된다. 정자는 세포질이 거의 없는 독특한 구조라서 냉동 과정에서 얼음 결정이 생겨 세포막을 손상시킬 위험이 낮고, 핵이 단단히 포장되어 있어 DNA가 잘 보존된다. -196℃ 액체질소 속에 들어가는 순간 모든 생화학적 반응은 멈추고, 세포의 시간도 같이 정지한다. 그래서 20년 된 정자로 태어난 건강한 아이들이 있고, 30년 보관한 정자로 임신에 성공한 사례들도 의학 논문에 보고되어 있는 것이다. 냉동 기간은 정자 품질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으며, 해동된 정자는 신선한 정자와 기능적으로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더구나 정자는 수가 많아서 건강한 정자만 골라 인공수정(IUI)이나 시험관아기(IVF)를 진행하면 된다.

 

필자의 말에 “지금 여자친구도 없는데, 굳이 해야 하나요?”라고 반문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해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 ‘없다’는 사실이 정자 동결을 가장 진지하게 고려해야 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정자 동결은 결혼 준비가 아니다. 출산 계획도 아니다. 언젠가 찾아올지도 모르는 ‘마음’의 변화를 대비해 선택권을 미리 보관해두는 일이다.

 

정자 동결은 난자 동결처럼 복잡한 호르몬 주사도 필요 없고, 비용 부담도 크지 않으며, 실패 위험도 거의 없다. 간단한 채취만으로 지금의 생식력을 그대로 미래로 배송해두는 셈이다.

 

지금은 필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5년 뒤, 10년 뒤, 당신의 마음이 달라졌을 때 “그때 동결해 둘 걸”이라는 후회를 막아줄 안전장치가 된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랑, 아직 열리지 않은 가능성, 아직 결정되지 않은 삶을 위해 선택권 하나쯤 미리 준비해두는 것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지혜일지 모른다.

용인신문 기자 news@yongi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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