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뜯고 있는 둔덕 저쪽
나처럼 풀 뜯는 중년 아낙
나도 보고 아낙도 나를 본다
앉은 걸음으로 풀 난 자리 따라가다가
서로 가까워지려는 걸음을 딴 데로 돌렸다
등 돌리고 있어도 자꾸 귀가 가렵다
홀아비로 늙고 있는 우리 집 수컷 생각
저 아낙의 토끼가 암컷이었으면 좋겠다고
뜬금없는 생각을 이어가다가
금방 얼굴이 붉어졌다
끝내 하지 못한 말
둔덕을 내려오며 나 혼자 중얼거렸다
가면서 돌아보니
내 걸음 따라 고개 들었던 아낙의 얼굴이
깜빡 붉어졌다
최영철 시인은 일상성에 대한 성찰과 탐구의 시인이다. 그에게 가 닿는 일상은 도시적 일상이며 사소한 일상이다. 그러므로 최영철 시인에게 영감을 불러오게 하는 일상은 남루하고 왜소하고 천박하고 버림받고 추하고 낮은 것들이다. 그것들이 그에게 와서 삶의 진실을 말하게 하고 삶의 생명을 느끼게 하고 삶을 희망하게 하고 삶을 구원하게 하는 것이다.
「춘정」또한 최영철 시인의 일상의 서정이 그대로 녹아 있는 작품이다. 어느 봄날 토끼에게 먹일 풀을 뜯으러 둔덕에 이른 남자는 맞은쪽에서 풀을 뜯으며 다가오는 중년 아낙을 만난다. 서로 가까워지려는 걸음은 기실 가까워지려는 마음일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낙의 얼굴이 깜빡 붉어졌>을까. 중년 남녀는 이미 마음이 서로 닿았던 것인데 애써 외면하고 비껴가는 것이다. 남자의 집에 홀아비로 늙어가고 있는 수컷은 남자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이제 봄이다. 최영철 시인에게 춘정을 안겨주었던 풀 뜯기를 위해 어디로든 나가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