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용 칼럼

  • 등록 2009.09.25 11:42:09
크게보기

윤승용 칼럼-

정운찬 교수가 사는 길

논란 끝에 정운찬 국무총리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끝났다. 왠지 허탈하고 씁쓸하다. 세상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더니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불행하게도 이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걸 이번 정 후보자의 청문회를 보며 새삼 실감했다.
내가 아는 정 후보자는 여러모로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쿨한사람', 요즘 유행어를 빌자면 '엣지있는 사람'이랄까. 그를 처음 본 건 1980년대 초 서울대학교 캠퍼스에서였다. 내가 군복무후 대학에 복학했을 때 젊은 정운찬 조교수의 경제학강좌는 비단 일반 모범생 뿐 아니라 학교 공부와는 담을 쌓은(?) 운동권 학생들에게도 들어볼만 한 강의로 입소문이 돌았다. 특히 그의 경제학원론은 꽤나 성가가 높아 항상 강의실이 넘쳤다. 그는 자신의 전공분야인 화폐금융론 분야에서 빼어난 실력도 있었지만 강의술도 뛰어나 강의시간 내내 수강생을 장악했다. 당시 서울대학교에는 한완상(사회학과), 백낙청(영문과), 김진균(사회학과), 김현(불문과), 김윤식(국문과) 등 학생들에게 존경받는 교수들이 더러 있었지만 일부 교수들은 강의술이 형편없어 명망만 듣고 수강했던 학생들 중 상당수는 수업시간 내내 조는 게 다반사였다. 그때 느낀 게 학문에 대한 깊이와 강의능력은 비례하지 않는 다는 점이었다. 이 점에서 정운찬 교수는 실력 못지않게 강의도 잘하는 교수였던 것이다.
더구나 그는 제자들에게 친절했고 또 격의없이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행보가 당시 학생들이 선호하는 사회참여적 성향이 아니었는데도 바로 이 소탈함 때문에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이른바 경기고, 서울대, 미국박사라는 경력에서 풍겨나오는 '샌님' 스타일이 아닌, 좀 과장하자면 '8방미인'이라고나 할까?
그 이후 내가 언론계에 들어선 뒤에도 종종 그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언론인들이 그의 고견을 듣기 위해 저녁식사모임에 초대하면 특별한 스케줄이 없는 한 선선히 응했다. 식사자리가 무르익으면 폭탄주도 사양하지 않았다. 기분이 좋을 때면 대여섯 잔도 마셨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가 직선제를 통해 서울대 총장에 올랐을 때 나는 "될 사람이 됐다"고 마음속으로 축하했다.
그에 대한 생각이 조금 바뀐 것은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시즌이었다. 그는 당시 여당인 민주당에서 탐을 내는 대선 후보군중의 하나였다. 그는 출마여부를 저울질 하다 결국 뜻을 접었다. 그가 대선 출마를 포기한 이유야 여러 가지였겠지만 나는 "자신의 명예를 지킬 수 있어 차라리 잘 됐다"며 그의 선택에 야릇한 위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자의든 타의든 정치권을 기웃거렸다는 점만은 '무오류 인물'로 여겨지던 그에 대해 약간의 실망감이 일기도 했다. 바로 이 같은 그에 대한 내 나름의 인식은 이번 총리 후보 지명이후 산산이 부서졌다.
그가 원래부터 '꾸리한 사람'이라고 평가절하 하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한때 그를 존경하고 따르던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이번 청문회 무대에서 심한 상실감을 안겨줬다. 이번 청문회는 학계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이라는 사람마저도 그저 한낱 '속물'이었음을 드러내는 한바탕 소극(笑劇)이었다.
이제 그는 루비콘강을 건넜다. 이번에 망가질대로 망가진 그의 명예와 자존심을 회복할 길은 평소에 학자로서 설파했던 자신의 생각을 소신껏 펼쳐서 '명재상'으로 평가받는 길 외에는 없다. 그는 자서전 <가슴으로 생각하라>에서 공자의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를 인용하며 "신바람이 나서 일하는 사람과 억지로 하는 사람의 능률이 같을 리 없다"고 썼다. 제발 청컨대, 정 후보자는 총리가 될 경우 강단과 책에서 갈파했던 자신의 소신을 '즐기듯이' 펴주길 바란다. 대통령과 각을 세우지 말라는 무골호인(無骨好人) 한승수 총리의 훈수일랑은 그냥 한귀로 흘려듣고.



용인신문 기자 webmaster@yonginnews.com
Copyright @2009 용인신문사 Corp.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용인신문ⓒ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지삼로 590번길(CMC빌딩 307호)
사업자등록번호 : 135-81-21348 | 등록일자 : 1992년 12월 3일
발행인/편집인 : 김종경 | 대표전화 : 031-336-3133 | 팩스 : 031-336-3132
등록번호:경기,아51360 | 등록연월일:2016년 2월 12일 | 제호:용인신문
청소년보호책임자:박기현 | ISSN : 2636-0152
Copyright ⓒ 2009 용인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mail to yonginnews@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