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찾아 헤엄친 1억의 정자들

  • 등록 2025.07.28 12: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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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뇨기과의사 서주태원장의 번식이야기 . 1

용인신문 |      그녀를 찾아 헤엄친 1억의 정자들

 

매일 아침, 남성의 고환은 묵묵히 일한다. 아무 지시도 받지 않았건만 성실하게, 성실하게, 정자를 만든다. 그것도 하루에 1억 마리쯤. 숫자로 보면 거의 소대급이 아니라 군단이다. 그렇게 많은 정자를 만들어서 뭐하냐고? 물론 대부분은 빛도 못 보고 사라진다. 사정이라는 출동명령이 떨어지지 않으면 전부 폐기처분. 유통기한은 3~5일 남짓이니, 오늘 만들어진 애들은 아무 일도 못 해보고 죽는 셈이다.

 

가끔일지라도 출격의 기회를 간절히 기다린다. 그녀가 받아만 준다면 언제든 출격할 준비를 갖췄다. 드디어 출동 개시! 하지만 안심하긴 이르다. 본격적인 ‘미션 임파서블’은 이제 시작이다. 정자 입장에서 여성의 생식기는 화려한 성(城)이라기보다 장애물 투성이의 전쟁터다. 정자가 질에서 나팔관까지 가는 거리는 약 15~20cm. 하지만 정자의 몸길이는 고작 0.05mm라, 자기 키의 4,000배를 헤엄쳐야 한다. 사람으로 치면 맨몸으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기어가는 격이다.

 

첫 관문인 질은 산성 환경이다. 정자에게는 그야말로 ‘유황지옥’. 정자에게 매우 치명적이고 죽기 쉬운 위험한 환경이라는 얘기다. 정자 수백만 마리가 이곳에서 바로 죽어버린다. 살아남은 자들은 자궁 경부를 통과해 자궁으로 진입해야 하는데, 여기도 또 하나의 난코스. 백혈구가 외부 침입자로 판단하고 공격을 개시한다. 면역 시스템 입장에서는 이 정자들도 ‘침입자’일 뿐이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마침내 자궁까지 도달한 소수의 정자들. 하지만 이들에게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목적지는 난자가 배란이 되어 기다리는 나팔관, 그것도 양쪽 나팔관 중에 어느 쪽일지를 알길이 없다. 좌측일지, 우측일지…. 만약 방향을 틀렸다면 그대로 탈락. 두 갈래 중 ‘이번 달’ 난자가 대기하고 있는 방향(나팔관)을 정확히 맞춰야 한다. 나팔관으로 진입하는 순간 남은 정자는 거의 수백 마리 수준이다. 시작이 억억이었는데, 살아남은 건 수백. 정자 세계에서 이건 생존율 0.0001%의 전쟁이다.

 

 

사실은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있다. “난자는 과연 기다리고 있는가?” 정자가 아무리 수가 많고 활동성이 좋아도 난자의 이번 달 ‘출근하는 날(배란)’을 정자가 알 도리가 없다. 난자는 한 달에 단 한 번, 단 한 개, 딱 하루만 나타난다. 그 하루를 놓치면 끝이다. 어떨 때에는 하루가 아니라 10~15시간만 정자를 기다리고 철수해 버린다. 정자 입장에선 깜깜한 터널 속을 난자 만나겠다고 달려가야 하는 기분이다. 헛수고가 될지, 가는 날이 장날(배란)일지 여부는 운명에 맡겨야 한다. 난자가 기다릴지, 없을지 여부, 기다린다면 왼쪽 나팔관커피숍에서 기다릴지 오른쪽 나팔관 커피숍에서 기다릴지 여부는 알길이 없으니 그냥 무조건 달려가야 한다. 이게 바로 정자의 숙명이다.

 

만약 부부가 정확히 배란일에 맞춰 성생활을 했으며, 정자와 난자가 만났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서 수정에 성공하는 건 아니다. 아무 문제없는 건강한 부부가 정확한 ‘장날’을 맞춰 부부관계를 가져도 임신이 될 확률은 10~15% 남짓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더라도 수정이 되어야 하고, 수정이 되어도 자궁내 착상이라는 고비를 넘겨야 한다.

 

정자는 머리끝에 아크로솜이라는 ‘뚜껑’을 쓰고 있다. 이건 난자의 단단한 외벽을 뚫기 위한 일종의 돌격 드릴이다. 수십 마리의 정자가 난자에 달라붙어 이 드릴을 작동시키지만, 끝내 문을 여는 건 단 한 마리. 나머지는 다 길을 터주고 희생된다. 이때 정자 하나가 난자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른 정자들의 진입은 차단된다. 수많은 희생 끝에 이뤄진 하나의 수정. 그 순간부터 세포분열이 시작되며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 주인공(수정성공 정자)을 위해 들러리 정자가 필요하다니. 마치 인생사를 닮은 것 같지 않은가.

 

수정이 되었다면 자궁내막으로 착상을 위해 내려가야 한다. 건강한 배아라야 하고, 착상환경도 받쳐 줘야 하는데, 이 과정이 난임 부부들은 착상 수능이라고 할 정도로 쉽지가 않다. 임신 성공을 위한 과정을 곱씹어 보면, 생명의 탄생은 결코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정자가 수억 마리, 난자는 한 달에 한 개, 성공 확률은 10~15%, 그 뒤엔 착상이라는 하늘의 뜻. 이쯤 되면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임신은 능력이 아니라 기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배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먼저, 우리는 로또복권 당첨보다도 낮은 확률을 뚫고 이 세상에 온 존재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도 감동적인 사실인가 말이다. 그러니 나 또한, 이 거대한 생명의 릴레이 앞에 ‘자손번식’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의술로써 실천하고 있음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

 

그러니 당부컨대, 남성들이여. 이 글을 통해 자연임신이 얼마나 위대하고도 어려운 여정인지 조금이나마 실감했다면, 이제는 바란다고만 하지 말고 노려하여야 한다. 정자 하나가 난자를 만나기까지 겪는 고난은, 말 그대로 기적의 서사다. 그 기적을 기다리는 데 그치지 말고, 건강한 생활습관과 정밀 진단까지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 특히 맞벌이 부부처럼 타이밍이 쉽지 않은 경우에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더 빠르고 더 정확한 방법이다. 1년 이상 시도했는데도 임신이 되지 않았다면, 이제는 망설이지 말고 의학의 문을 두드릴 때다. 그래서 빨리 아빠가 되는 기쁨을 누리시길!

 

약력: 연세대 의대 졸업

전 대한생식의학회 회장

전 제일병원 병원장

서주태비뇨의학과의원 대표원장

용인신문 기자 news@yongi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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